아! 큰스님 사자후를 하소서-서옹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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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큰스님 사자후를 하소서-서옹 스님
  • /제주불교
  • 승인 2013.01.1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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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주체적 절대 이율배반의 해체


근대인간(近代人間)은 비판적이고 객관 타당한 것이 아니면 용인하려 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선(禪)의 객관적인 타당성을 밝혀서, 선이야말로 영원히 존재가치가 있는 참다운 종교임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대적인 인간은 인간의 이성을 자각한 존재이다. 이 이성적인 입장은 반이성적인 것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 늘 있게 되는 것이지, 반이성적인 것을 완전히 제거해서 이성적인 것만 있게 하는 것은 이성의 구조상 불가능하다. 이성적인 것과 반이성적인 것과의 대립은 이성의 근본구조이며 이성과 반이성이 대립해서 이율배반(二律背反)되는 것을 상대적 이율배반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성은 반이성을 항상 수반하므로 반이성적인 것을 궁진무여(窮盡無餘)하게 제거해 버린 순수한 이성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성을 참이성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대적 이율배반을 더욱 근원적으로 비판하면 상대적 이율배반이 절대적으로 전체적 이율배반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을 절대적 이율배반이라고 말한다. 이 절대적 이율배반은 관념적으로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절대적 이율배반이 자기화되어 버린 것을 말한다. 이것은 바로 근대 이성적인 입장에 있는 근대적 인간의 한계라 할 수 있다. 이 절대적 이율배반에 인간의 절대부정(絶對否定)의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인생문제를 다룰 때에 인간의 생사문제를 중요하게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생과 사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사적 생명은 생하여 사를 극복할 수 있나니 사가 없는 순수한 생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생명의 밑바탕에서는 생사라는 이율배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생사의 상대적 이율배반을 근원적으로 따져 본다면 생이라고 하는 것은 사를 수반하는 생이므로 순수한 생이라 할 수 없으며 이 생사적 생명은 절대적으로 사의 생명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생명은 생사라는 절대적 이율배반을 밑바탕으로 해서 성립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생사를 확장하면 물질의 생멸과 통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존재와 비존재에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고뇌는 생사의 절대적 이율배반 때문이니 이것을 여의고 해탈하려고 하는 것은 거기에 이성적인 판단이 작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생사의 절대적 이율배반과 이성․반이성의 절대적 이율배반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일체(一體)이다. 이성의 절대적 이율배반과 생사의 절대적 이율배반은 구체적으로 일체가 되는 것이니 이것은 보통사람의 본래적인 참모습인 것이다.

보통사람은 의식이 현행(現行)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 입장에서 주체적 절대 이율배반이 되어 도달한 경지는 순수의식(純粹意識:분별이 없는 의식)의 경지이며 선정진중(禪精進中)의 한 단계이다. 이 순수의식의 경지에서 주체적으로 절대적 이율배반이 되어 나아가면 무의식의 경지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잠이 깨어있을 때의 무의식과 무몽무상(無夢無想)한 숙면(熟眠)때의 무의식이 주체적으로 절대적 이율배반이 되어서, 무여하게 포괄적이고 전체적이고 근원적으로 파고 들어가 궁극․근원적인 경지에 도달하면 종문(宗門)에서 말하는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비로소 이루어지게 된다. 이 궁극․근원적인 주체적 절대 이율배반이 해체되면 청정(淸淨)하여 일물(一物)도 없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경지로 마침내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좌재(坐在)하면 형극림(荊棘林)을 투과한 것이 못된다. 여기를 지나 돈연투과(頓然透過) 견성(見性)하여 정안종사(正眼宗師)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깨달은 것이 되는 것이다. 이 형극림을 투과해서 견성한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주체성이 되는 본래면목이 자각한 것이다.

그런데 본래면목이 자각한다고 하면 한정된 시간을 뜻하므로 엄밀히 말하면 자각이라고도 할 수 없다. 본래면목 자체가 엄연히 본래 그대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본래면목은 인간 본래의 진실상이다. 이것은 시간이나 장소에 상관없이 어느 시간이나 어느 장소나 누구에게든지 타당하며 따라서 선문에서는 이 본래면목을 본분(本分)이라고 하기도 한다.

각(覺)하면 기연(機緣)은 실로 여러 가지로 잡다하다 하겠다. 그 무한한 기연은 결국은 절대적 이율배반에 불과한 것이다. 주체적 절대 이율배반에까지 가서 그것을 투과하고, 본래로 불생불멸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본래로 청정무염(淸淨無染)하여 자유자재하며, 형상이 없으면서 일체 형상을 창조하는 진실한 자기로 돈연히 전환하므로 근본적으로 해결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 무명번뇌(無明煩惱)가 일단일체단(一斷一切斷)이 되는 것이고 일처투 일체처투(一處透 一切處透)하게 되는 것이다. 돈오돈수(頓悟頓修)는 이를 말한다.

이는 불교의 궁극적인 방법인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식(六識)과 칠식(七識)도 아니고, 무의식의 제8아뢰야식도 아니고, 종교에서 말하는 신(信)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선(禪)에서 말하는 각(覺)이다. 깨달아 진실하게 된 ‘자기’는 깨닫기 이전의 ‘자기의 근원’이 되는 것이고, 깨닫기 이전의 ‘자기의 작용’은 바로 깨달은 ‘진실한 자기의 작용’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각(覺)한 자기의 현실에서 궁극적으로 부활하는 데에 진정한 종교가 성립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현실 속에서 이성적인 자기가 주체가 되었던 나가 마침내 진정한 종교를 깨달아서 진실한 나가 된 것이다.

이 각(覺)한 현실은 미(迷)한 현실과 시간․공간적으로 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공간의 근원에서 성립되어 나오는 것이다. 또한 깨달은 자기, 즉 근원적인 주체는 이성과 감성의 근원이며, 이성과 감성은 깨달은 자기의 작용이 된다. 이 근원적인 주체는 이성을 초월해서 자유로이 이성으로 살고 생사를 초월해서 자유로이 이 생사하는 영원의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역사를 무애자재(無碍自在)하게 창조하는 입장이다. 소위 천국이나 극락 세계는 현실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세계이므로 결국 도피염세(逃避厭世)하는 것이 되어서 현실을 구제한다고 할 수 없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현대 과학문명을 비판하고 이 과학문명과 선(禪)과의 관계를 투찰(透察)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다시 투찰하면 미래의 세계 역사를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 하는 의심이 쉽게 풀리게 된다.

선에서는 일체를 융합하는 보편의 ‘일(一)’과 ‘다(多)’ 혹은 특수(特殊)가 불이일체(不二一體)인 존재원리를 가지고 있다. ‘다(多)가 없는 일(一)’은 내용이 없는 공허에 빠지게 되고, ‘일(一)이 없는 다(多)’는 통일이 없는 분열에 빠지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데 과학문명은 다화(多化) 혹은 특수화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문명은 ‘보편(普遍)의 일(一)’을 상실하게 되어 분열병에 걸리고 있는 것이다. ‘다(多)’를 상실한 도그마적 신앙으로 ‘일(一)’을 믿었던 중세기는 일다불이일체(一多不二一體)의 존재원리를 파괴하게 되어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대로 근대문명은 ‘일(一)’을 상실한 ‘다(多)’만으로 치닫고 있으니 이대로 간다면 결국 분열병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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