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큰 스님 사자후를 하소서- 동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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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큰 스님 사자후를 하소서- 동산 스님
  • /제주불교
  • 승인 2013.02.22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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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노력으로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



불교는 합리주의와 객관주의 매우 중시

미혹으로부터 깨달음으로 이끄는 종교



고통을 벗어나 행복을 성취하려는 종교

모든 중생을 부처로 만들고자 하는 종교





모든 종교는 인간에게 고통과 불행이 없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가 존재하는 것은 그 방법이 옳건 그르건 간에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구제할 수 있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교의 역사는 인간이 역사를 시작하면서부터 함께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시시대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느끼는 공포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 능력 밖의 불가사의한 힘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것에 의지하고 제사 지냄으로써 재앙을 이기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원시종교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다 진보된 체계를 갖춘 고등종교하 해도 따지고 보면 인간의 불행과 외적 불안에 대한 구원의 심리에 상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자기 종교의 가르침만이 위대한 진리라는 편견과 독단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리에의 편견은 종교라는 권위를 배경으로 무조건적인 믿음과 복종을 강요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례를 찾아보면 얼마든지 많습니다. 구라파에서 행해진 종교적 권위와 독선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서양의 역사를 읽어보면 프랑스의 독립 운동에 앞장섰던 잔다르크는 종교재판에 의해 화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고 주장했던 이탈리아의 과학자 부르노 역시 로마교회에 의해 산 채로 화형을 당했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신이 태양을 만들었다고 믿었던 당시의 교회는 오늘날의 보편적 상식인 지동설을 오히려 미신으로 단정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이 생기는 것은 ‘여호와’ 또는 ‘알라’로 불리는 전지전능한 창조의 신, 절대의 신을 아무런 의심없이 믿는데서 오는 독단 때문입니다. 절대란 언제나 아집과 독선을 초래하게 되고, 마침내 그로 인해 오류를 범하기 마련입니다.

불교의 경우는 이런 종교와는 다릅니다. 불교는 삼라만상을 창조와 피조의 관계로 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종교사상 체계를 하나의 미혹 즉 미신으로 간주합니다. 우주와 세계를 움직이는 질서나 원리는 절대신의 자애나 분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결정하고 창조해 나가는 법칙에 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연기(緣起)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연기란 만물이 서로 의지하면서 생성과 발전을 해 나가는 법칙을 말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맹목적인 믿음, 불합리하기 때문에 오히려 믿는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의 본질을 분석한 결과, 분명하게 파악된 원리만을 진리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합리주의와 객관주의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설사 부처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합리성과 객관성이 없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불교가 일반 종교와 다른 특징과 목적은 대체로 세 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첫째는 미혹으로부터 깨달음으로 이끄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이를 전미개오(轉迷開悟)라고 합니다. 우리 중생은 탐진치 삼독 번뇌로 인해 온갖 불합리한 허위와 환상, 가설(假設)에 빠져 삽니다. 불교는 바로 이런 것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 의미는 바로 아집과 독선, 허위와 불합리로부터 벗어난 존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현대를 과학적 합리주의의 시대라고 합니다. 때문에 비과학적인 종교는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교회는 문을 닫고, 성직자와 신도의 수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종교의 영향력은 점점 감소되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대라고 해서 종교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물질적 풍요에 비해 정신이 황폐해 가는 현대 사회일수록 종교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진다고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있는 것은 현대인의 과학적, 합리적 사고 방식에 비추어 많은 종교가 비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아무리 창조와 피조의 진리를 주장해도 과학은 생명의 근원을 진화론적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창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신학은 그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대의 모든 종교가 다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의 경우, 과거에 미신적 생각이 지배했던 사회에서보다는 과학화된 현대에 이르러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참다운 종교, 진리의 종교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불교가 요즘처럼 세계인들의 자발적인 공감을 받은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불교의 가르침이 어리석은 믿음을 없애고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서양의 종교를 비롯해 유신론적 종교들은 신을 믿으면 행복해진다고 가정하고, 모든 교리체계를 여기에서 출발시켜왔습니다.

이에 비해 합리적 분석과 판단에 의해 도출된 결론으로써 그것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진리만을 믿으라고 하지 어리석은 믿음 즉 미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믿음은 맹목적인 것보다는 올바른 진리를 믿을 것을 요구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무한한 능력과 함께 나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개는 그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낸 어떤 것에 스스로 노예가 되어버린 채 자신의 무한 능력을 잊고 삽니다. 그것은 거짓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입니다. 이것을 미신이라고 합니다.

이에 비해 정신(正信) 즉 올바른 믿음이란 진리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허구가 아닌 사실이며 거짓이 아닌 진실에 대한 믿음입니다. 허구와 거짓은 감정으로는 믿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죽은 자식을 살아 있다고 믿는 어머니의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애틋하고 열광적인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이에 비해 사실과 진실에 대한 믿음은 이성적인 것입니다. 아무리 홍수가 지지 않기를 기도해도 먹구름에서 소나기가 내린다는 사실을 알고 이 사실을 믿는 그것은 얼음처럼 차가운 것이지만 자기와 남을 속이지 않습니다.

둘째는 고통을 벗어나 행복을 성취하려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이를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모든 종교는 인간의 행복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인간에게 괴로움이 없다면 종교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종교인들이 자기 종교를 믿기만 하면 당장에 죄가 없어지고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자기 종교만 믿어야지 다른 것을 믿으면 안 된다는 독단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과 평화가 깨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독선을 배제하고 포용성을 가르칩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자신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하여 서슴없이 총칼을 들기도 하고 남의 종교를 무조건 미개한 것으로 몰아붙여 말살하려 해 왔습니다. 마치 그러한 독선을 진리인 것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이에 비해 불교는 단 한 번 진리의 이름으로 이웃을 박해한 일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가르침에는 반드시 ‘일면적 진리’가 내포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포용했습니다. 불교가 넓은 지역에 전파되면서 다른 종교사상과 마찰을 빚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불교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 내놓는 가르침은 우선 자기가 처한 현실을 똑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근본고(根本苦)를 인식하고 거기서 벗어나는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불교의 이러한 현실인식을 염세주의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불교의 가르침을 확실히 모르는 데서 생긴 것입니다. 불교에서 인생과 세계를 무상하고 허망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벗어나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중생계의 현실은 생로병사와 제행무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탐욕과 집착으로 싸움이 일어납니다. 남보다 더 많이 갖기 위해서 더 많이 죽여야 하고, 그러다 보면 화살이 대포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무상한 물질적 탐욕에서 벗어나라고 말합니다. 물론 물질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중생이 거기에 너무 집착하므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물질은 무상한 것이니 거기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말라고 합니다. 진실로 중생이 구제되기 위해서는 전도몽상의 현실이 부정되어야 합니다. 파괴는 건설의 어머니이듯, 작은 행복의 파괴가 영원한 행복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는 모든 중생을 부처로, 모든 범부를 성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이를 혁범성성(革凡成聖)이라고 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에는 원래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종교입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교도가 교주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는 없습니다. 기독교나 회교는 인간이 신이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중생이 부처가 된다고, 그것을 목표로 삼는 종교입니다. 이것은 사상적으로 보면 완벽한 평등사상입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사회는 엄격한 계급제도가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부정하고 인간이 본래부터 평등한 존재이며 깨달으면 다 부처가 된다고 했습니다. 서양의 평등사상은 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과 신과의 불평등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불교의 평등은 신마저도 없는, 모든 중생이 무차별한 평등입니다. 《화엄경》에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그 본성에서 차이가 없으며 완전한 평등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불교에서 부처님은 중생의 지배가 아니며 본성에서는 동등한 존재입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먼저 깨달은 스승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또한 불교는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적인 종교입니다. 즉 신의 은총이나 운명의 조화에 인간의 미래를 맡기지 않습니다. 자력에 의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인과응보의 교리입니다. 인간에게 운명이라는 굴레를 씌우는 신과 같은 존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인간 스스로가 그렇게 믿고 있을 뿐입니다. 그 굴레를 벗어 던지는 순간부터 인간은 해방된 존재가 됩니다. 이를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이 같은 이유를 들어 불교는 오히려 현대에 와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받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믿던 서양의 지성인들이 불교의 진리에 눈뜨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는 불교는 오래된 종교이지, 결코 낡은 종교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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