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큰스님 사자후를 하소서-성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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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큰스님 사자후를 하소서-성철 스님
  • /제주불교
  • 승인 2013.03.0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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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설법 들을 수 있어야 참소식 알게 돼




1. 생명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일체 만법이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이어서 시공을 초월하여 거래(去來)가 없고, 생명도 거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엄에서도 ‘일체법불생(一切法不生)이요, 일체법불멸(一切法不滅)’이라 하였고, 법화(法華)에서도 ‘제법(諸法)이 종본래(從本來)로 상자적멸상(尙自寂滅相)’이라 하였는데, 이 적멸상은 생멸이 끊어진 불변상(不變相)을 말함입니다.

이 불생불멸을 진여(眞如), 법계(法界), 연기(緣起), 실상(實相), 법성(法性), 유식(唯識), 유심(唯心) 등 천명만호(千名萬號)로 이름하나 그 내용은 다 동일합니다. 이는 우주의 근본원리이며, 불타(佛陀)의 대각 자체(大覺 自體)이어서 일체불법(一切佛法)이 불생불멸의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불생불멸의 원리는 심심난해하여 불타의 혜안(慧眼)이 아니면 이 원리를 볼 수 없어 불교 이외의 종교나 철학에서는 거론치 못하였으며, 이 불생불멸은 자고로 불교의 전용어가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고도로 발달되어, 현대과학에서도 원자물리학으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하여 불교의 이론에 접근하여 구체적 사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타는 3천 년 전에 법계의 불생불멸을 선언하였고, 과학은 3천년 후에 불생불멸을 실증하여 시간차는 있으나 그 내용은 상통합니다.

진리는 하나이므로 바로 보면 그 견해가 다를 수 없습니다. 다만 불타의 혜안이 탁월함에 감탄할 뿐입니다.

불교가 과학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에 접근한 과학이론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불생불멸의 상주법계(常主法界)에는 증감과 거래(去來)가 영절(永絶)한 무진연기(無盡緣起)가 있을 뿐이니, 이것이 제법의 실상입니다. 이 무진연기상의 일체 생명은 성상일여(性相一如)이며 물심불이(物心不二)여서 유정무정(有情無情)의 구별이 없고, 생명은 유정무정의 총칭입니다.

그러므로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들을 수 있어야만 생명의 참소식을 알게 되는 것이니 개개(個個) 생명 전체가 절대여서 생멸거래가 없습니다.

무정생명론은 너무 비약적인 것 같으나 유정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요, 무정도 항상 활동하고 있으나 예를 들면, 무정물을 구성하고 있는 근본요소인 소립자(素粒子)들은 스핀(Spin)을 가져 항상 자동적으로 운동하고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바위들도 간단없이 운동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백억의 살아있는 석가가 취하여

훈풍 끝에 춤추는도다.

百億活釋迦

醉舞春風端



2. 불교의 이상은 인간의 범주에 머물러야 합니까, 아니면 초월해야 합니까?

불교에서 볼 때는 생멸 즉 진여이며, 따라서 현실이 절대이므로 번뇌 즉 보리(菩리)이며, 중생 즉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래 일체를 초월하여 일체를 구족한 절대적 존재이니 다시 초월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타가 출현한 것은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전하는 것 뿐이요, 중생을 제불로 변성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진금(眞金)을 어떤 사람이 착각하여 황토로 오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금을 아무리 오인하여 황토라 호칭하여 사용하여도 진금은 변함없이 진금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진금을 다시 구할 것이 아니요, 오인된 착각 즉 망견(妄見)만 시정하면 진금 그대로입니다.

이와 같이 일시적 착각으로 본래 진불(眞佛)을 중생으로 가칭하여 중생으로 행동하여도 진불은 변함 없으므로 불용구진(不用求眞)이요, 유수식견(唯須息見)하라. 즉 진(眞)을 구하지 말고 오직 망견만 제거하면 됩니다.

이렇게 중생이 진불(眞佛)이며, 사바가 즉 정토이며, 현실이 즉 절대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편협한 망견을 고집하여 겨울의 얼음을 모르는 여름의 하루살이가 되지 말고 본래시불(本來是佛)의 진(眞)소식을 개오(開悟)하여야 합니다.

비로자나불의 아마위 사람이

십자가두에 섰도다

昆廬頂上人

十字街頭立



3. 진정한 뜻에서 인간회복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본래 일체를 초월하고 일체를 구족한 절대적 존재이니 이것을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합니다. 이 본래시불을 중생으로 착각하여 중생이라 가칭하며 중생으로 행동하고 있으니 이 망견을 버리고 본래불(本來佛)인 인간면목을 확인하는 것이 인간회복입니다.

진금(眞金)을 황토로 착각하였으나 활연히 각성하여 진금임을 확인하면 다시는 더 구할 것이 없음과 같습니다. 또한 면경(面鏡)과도 같습니다. 본래 청정한 면경이 일시적으로 때가 끼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하나 그 때만 닦아버리면 청정한 그 면경이 그대로 드러나서 일체를 비출 것이니 다른 면경을 구할 것이 없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인간의 본래면목, 즉 심경(心鏡)을 덮은 때와 먼지를 상세하게 규명하여 그 진애(塵埃)가 티끌만치도 없도록 철저히 제거함을 인간 회복의 본령(本領)으로 삼고 있습니다.

심경을 덮고 있는 이 진애인 망견을 추중과 미세로 양분하여 추중은 제6식, 즉 현재의식이며, 미세는 제8식, 즉 무의식입니다. 이것만 완전히 제거하면 자연 통명(洞明)하여 진불인 본래면목이 출연하는 것입니다.

면경을 부수고 오너라

푸른 하늘도 또한 몽둥이 맞아야 하는도다.

打破鏡來

靑天也須喫棒



4. 종교 안에서 인간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까?

종교를 일반적으로 유한에서 무한으로 상대에서 절대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불교에서는 유한이 즉 무한이며, 상대가 절대임을 주장합니다.

일반종교는 현실 외에 절대를 따로 세워서 자기가 생존하는 현실 유한의 세계를 떠나 절대무한의 세계에 들어감을 목표로 삼습니다.

불교에서는 현실이 즉 절대이어서 인간이 절대무한의 세계에 살고 있으니 절대세계를 다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절대’를 ‘상대’로 착각하는 망견만 버리면 삼라만상이 전체가 절대이며 일체가 본래 스스로 해탈하니 불교의 진리는 인간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가령, 태양이 하늘 높이 밝게 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눈을 감고서는 ‘어둡다, 어둡다’고 소리치면 눈 뜬 사람이 볼 때에는 참으로 우스울 것입니다. 그러나 어둡다한탄하지 말고 눈만 뜨면 자기가 본래 대광명(大光明)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부처도 또한 찾아볼 수 없거늘

어떤 것을 중생이라 부르는가.

不也見不得

云何名衆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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