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고려속의 제주 ④-몽골지배기와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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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획 고려속의 제주 ④-몽골지배기와 제주
  • 강승오 기자
  • 승인 2005.03.04 11: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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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불교 영향 상당히 받았을 것”

고려초 제주, 개경 팔관회 참석 등 불교세 커

몽, 고려 호국불교 항몽성 없애려 ‘라마’확산시켜

‘목호의 난’ 이후 조선시대 들어와 교세 급감



[그림1]# 민간·샤머니즘·불교 결합해

제주의 불교문화를 이야기함에 있어 고려태조 이후는 각종 문헌에 전해 내려오는 형태지만, 그 이전은 당시 우리민족의 일반적 신앙형태와는 달리 제주의 특수한 지리적 여건, 수많은 전쟁과 외부와의 교류를 통한 문물의 유입으로 독특한 형태를 인 것으로 평가한다.

불교가 제주에 도입되기 전의 신앙형태에 대해 전해지는 문헌은 없지만, 일반적인 경향으로써 원시종교형태인 자연숭배와 샤머니즘적인 신앙이 복합돼왔고 볼 수 있다.

고려 태조가 통일전쟁을 전개할 때는 전국 어느 지역에서나 마을과 개인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고자 산천과 부처님을 숭배하고 있었다. 태조가 통일왕국을 세운 후에는 불교와 더불어 천신(天神)·오악(五嶽)·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 등의 숭배의식을 국가의례로 삼아 부처와 토착신앙의 신격을 섬겨왔으며, 이를 자신 이후에도 이어나가라고 유훈을 남기게 된다.

이후 성종 9년(990)부터는 일부 산천을 택해 국가제사가 거행되기 시작했다. 이는 성황신앙이 고려초기에 이미 중국에서 전래돼 기존의 산천신앙 및 무격(巫覡)신앙과도 습합돼 퍼져갔음을 알 수 있다. 이 성황신앙과 함께 불교가 국교였던 만큼 사찰도 곳곳에 들어서게 된다.

‘탐라기년’에 의하면 “송나라 종단이 한라산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배를 타고 오다 독수리가 위협하고 북풍이 크게 몰아쳐 종단이 탄 배를 비양도 바윗더미에 부딪쳐 침몰시키니 그에 놀란 조정과 도민(島民)이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미뤄 당시 한라산에서도 제를 봉행했음을 알 수 있다.

# 몽골인 통해 라마불교 유입돼

탐라민은 태조대부터 불교가 성행한 육지부 지역과 자주 교류했고, 국가의례인 개경 팔관회 등에 빈번하게 참석하면서 탐라에서의 불교세는 점차 확대돼간다. 충혜왕 4년(1343)에는 왕사를 역임했던 흑선선사가, 충목왕 4년(1348)에는 종범선사와 충렬왕대(1275∼1308)에는 혜일선사가 탐라에서 활동했다.

이때 당시 탐라에는 수정사(제주시 외도1동)·묘련사(북군 애월읍 광령리)·서천암(제주시 도평동)·보문사(북군 조천읍 대흘리)·법화사(서귀포시 하원동)·원당사(제주시 삼양동) 등의 사찰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포함, 최대 76 곳이 고려시대 폐사지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제주문화예술재단이 제주도 용역으로 최근 실시한 불교유적 조사에서 밝혀졌다.

이처럼 사찰의 수가 많아진 것은 본격적인 몽골의 지배기에 들어가면서 당시 탐라에는 몽고의 전마(戰馬)를 육성하기 위한 국영목장이 들어서고 말 사육을 담당할 몽골인들이 제주로 유입되면서 이들이 신봉하는 불교 사찰을 창건하게 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쿠빌라이칸이 집권하면서 서역의 라마불교의 승려가 국사로 추대된 이후부터 라마불교는 국가의 지원속에 성장하게 된다. 이같은 지원이 있었던 것은 당시 몽골인이 가장 신봉하던 종교였기 때문이다.

당시 라마불교는 전지전능한 최고신인 ‘하늘’과 인간을 매개하는 승려를 신앙하는 형태로 이뤄지고 있었다. 이에따라 몽골은 무력으로 점령한 지배지역의 종교에 자신들의 신앙하던 라마불교를 융합해 포교에 나섰으며, 이는 당시 고려에서 행해지던 민간신앙과 샤머니즘과 어우러지면서 빠르게 유입되게 된다.

[그림2]이에 따라 탐라에도 이들 몽골인들이 들어오면서 이같은 신앙형태가 민중들 사이로 빠르게 전파되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의 김일우 박사는 “몽골인의 유입과 목축업의 발달로 경제력이 성장하면서 몽골인들이 중심이 돼 라마불교적 색채를 띤 사찰을 창건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김 박사는 법화사에서 출토된 막새기와를 비롯해 도내 폐사지중 성산읍 오조리 사지에서도 법화사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청자역상감당초문편(靑磁逆象嵌唐草文片)’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나오고, 그 규모도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는 것 등으로 당시 도내에는 라마불교 사원이 들어섰음을 추측할 수 있다고 밝혔다.

현재, 오조리사지에서는 이같은 추측을 확인해볼 수 있는 기와편 등이 발견돼 정밀 조사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고려시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진 폐사지들이 도내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 또한 당시 목축업을 담당하던 ‘하치’들이 마을을 이뤄 살면서 사찰을 통한 지역의 세력권을 넓힘으로써 세력을 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탐라의 사찰은 종교시설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력을 행사하는 ‘정교(政敎)일치’의 세력을 펼쳤던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 ‘목호의 난’ 거치며 라마불교 쇠퇴

이처럼 사찰들의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단순한 종교의식만이 아닌 정치적으로 ‘관청’의 역할도 하면서 사세는 점점 확대하고 각지역의 사찰을 중심으로 인근 군소 사찰들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등 사찰은 지역 ‘목호’와 공생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목호들의 세력은 원이 멸망한 공민왕대까지 이어진다. 탐라 목호는 본국 원이 사실상 망한 공민왕 17년(1368) 이후에도 고려에 자주 맞섰다. 특히 공민왕 23년(1374)에 벌어진 목호세력과 고려의 충돌에서 패한 목호는 최후를 맞게 됐고, 탐라는 이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고려에 재귀속되기에 이르렀다.

몽골이 설치한 동·서 아막의 탐라 목장 가운데 서아막 목호가 탐라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공민왕 23년에 이르러 ‘난’을 일으켰다가 최영 장군에 의해 서귀포시 법환 앞바다의 범섬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렇게 목호세력은 패배를 맞이했지만 잔존세력과 몽골족의 후예, 그리고 반(半)몽골화된 탐라민에 의해 법화사 등은 신앙생활의 근거지로 남아있었다.

몽골은 고려에서 끌고간 아이들을 라마승으로 만들어 고향으로 다시 보낸다. 이는 고려불교가 호국불교로서 항몽의지를 갖고 있는 것을 누르기 위한 몽골의 고육책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라마불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몽골지배기 동안 제주불교는 이들 몽골인과 라마불교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제주불교가 다른지역과는 다른 형태로 발전해 나갔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억불정책으로 인해 수면아래로 가라앉아 철저한 민간신앙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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