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큰스님 사자후를 하소서-청화 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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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큰스님 사자후를 하소서-청화 큰스님
  • /제주불교
  • 승인 2013.04.05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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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은 우리가 삼매에 들기 위해서 하는 것



스스로 인생관 밑에서 정보 잘 정리해야

우리의 지상 과제 ‘성불’ 성취할 수 있어



부처님은 지식이 아닌 바로 생명이기에

부처님 생명을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한다





우주는 도리나 논리나 이치로 존재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은 우주 자체가 하나의 생명입니다. 자연계가 있어서 산이 있고 나무가 있고 돌멩이가 있는 것이니까, 우리가 보는 것이 객관적인 현상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겉에 있는 현상적인 모습뿐이고, 깊이 파고들면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물질의 강도가 제일 높은 금강석이든 금이든 그 어떤 것도 분석해 놓고 보면, 결국 전자․중성자․양성자 같은 것들이 적당히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 어떤 현상이든 중생이 상식적으로 ‘보는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주의 생명은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즉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는 하나의 원만한 생명인 것입니다. 평등 무차별의 한 생명입니다.

우리 중생은 현상적으로 상(相)만 보니까 천차만별의 상으로 구분되지마는, 성자의 깨달은 눈으로 볼 때는 근본 성품을 다 봅니다. 성품으로 보는가 겉으로만 보는가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성자들은 성품으로 보고, 우리 중생은 겉의 상으로 봅니다. 상에는 여러 가지 상이 있습니다. 나라는 상, 너라는 상, 좋다는 상…한도 끝도 없습니다.

현대 학문이라는 것도 모두가 다 상으로 봅니다. 특히 정보화 시대라는 것은 정보가 많아 정보 과다시대라 하는데, 정보가 너무 많으니까 정보를 다 수용하다 보면, 우리 마음이 안정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굳건한 주장과 인생관 밑에서 정보를 잘 정리해야 됩니다. 그래야 이른바 성불이라는 우리의 지상 과제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삼매라는 것은 우리 불자가 어느 때 들어가든 우리가 거쳐야 됩니다. 삼매를 거치지 않고서는 성불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매라는 것은 심일경성(心一境性)입니다. 우리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모으는 경계가 이른바 삼매입니다. 어떤 경우로 들어가든지, 꼭 삼매를 거쳐야 우리 본연의 목적인 부처를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삼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명상법으로 해서는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그 명상법이 부처님 사상에 따라야지, 그냥 세속적인 명상법으로 해서는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왜 못 들어가는가? 일반 세속적인 명상법은 아(我)를 못 떠납니다. ‘나’라는 ‘아’를 못 떠납니다. 그래서 제법공의 도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아’를 떠나 제법공의 도리를 알고 자기라는 것을 초월을 할 수가 있어야 삼매에 들어갑니다.

삼매에 들어가면 본래면목 자리를 깨닫습니다. 우리 재가불자들은 집안에 계시기에 삼매에 들어가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때문에 재가불자들 처지에서 염불공부보다 더 좋은 공부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사실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또는 지식이 아니라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님 생명을 그대로 밀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도 생명이고 만중생들이 참된 눈으로 볼 때 생명 아닌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중생들은 알고 모르고 상관없이, 사실은 우주의 생명 자리를 항시 그리워하고 추구하는 흠모심이 있습니다. 마음이 맑은 사람들은 부처님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우리의 생명의 중심을 흠모하는 마음이 더욱 더 강렬할 것이고, 마음이 어두운 사람들은 별로 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속에서도 시를 쓴다든가 할 때 감성이 풍부한 분들은 예술적인 재간이라든가 종교심도 보통 사람보다 강합니다. 위대한 시인치고 종교심이 강하지 않는 분이 없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 영원의 세계, 우리 생명의 본고향 자리에 대한 동경이 항시 강렬하게 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물질적인 세계에만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무치도록 간절하고 강렬한 동경과 흠모 그리고 갈앙심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다 깊이 생각하고 예술적으로 숙성되어서, 마음이 그야말로 온화하고 순수한 분들은 갈앙심도 더 강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누구나가 다 마음, 즉 강강(剛剛)한 마음을 녹여야 됩니다. 우리가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춰 보더라도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그냥 버티고 있고 교만심이 있고 우쭐하면, 그 얼굴이 얼마나 굳어 버립니까? 그러나 부처님 앞에서 다 풀어 버리고 모든 사람을 다 수용하고 용납하는 마음, 관용스러운 마음을 품을 때는, 얼굴도 그냥 봄바람같이 보입니다.

부처님 생명을 받아들여서 부처님 명호를 외면, 명호를 외는 그것이 바쁜 중에 공부할 때에 있어서는 가장 하기 쉽고 통하기 쉽습니다. 이왕이수(易往易修)라 닦기 쉽고 깨닫기 쉽단 말입니다. 이것도 제가 지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용수(龍樹) 보살이라는 제이의 석가라 할 수 있는 그 어른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용수보살은 십사대 조사입니다. 또 팔종조사(八宗祖師)라 하여 모든 종파가 그 어른을 윗조사로 모셨습니다. 선이고 정토고 또는 염불이고, 어떤 것이나 용수보살을 조사로 받드는 것입니다.

용수보살에 더 앞서서 마명(馬鳴) 대사가 계십니다. 마명대사 이분은 열두 번째 분이에요. 용수 보살은 열네 번째 조사고, 마명 대사는 열두 번째 분인데, 한문자로 마명을 표현하면 말 마(馬)자 울 명(鳴)자 마명입니다. 어째서 마명이라 했던가?

옛날 인도의 북인도에 ‘카니시카왕’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중앙 인도를 점령했습니다. 점령했으나, 중앙 인도가 너무 가난해서 무엇인가 대상금을 받아내야 할 것인데, 가져갈 것이 별로 없단 말입니다. 마침 마명대사가 하도 위대하다 하니까, 카시니카왕이 불심이 좀 있었던가, “그러면 그대들이 전쟁에 진 대상금 대신에 마명 대사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명대사는 대상금 대신 포로가 되어 북인도로 끌려갔습니다.

마명 대사를 끌어다가 놓으니까, 북인도 대신이라든가 일반사람들 입장에서는, 애쓰고 전쟁에서 이겼는데 하필이면 중만 하나 데리고 왔나하고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 앞에서 말은 못하지만 불평이 많단 말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일반 대중한테 보여주어야 할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카시니카왕은 마명 대사를 대단히 숭상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기적적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망아지 여남은 마리를 마당에 놓고서 말이 제일 좋아하는 먹이를 주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마명 스님 보고 당신이 위대한 도사라고 하니까. 저 말에 대해서 부처님 설법을 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명 대사가 부처님 법문을 아주 간곡하게 하셨단 말입니다. 사람도 감동시키기 어려운데, 동물을 감동시키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마명대사 설법을 하니까, 말들이 자기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먹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먹지 않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어요. 그래서 말 마자 울 명자, 말이 울었다 해서 그렇게 지었습니다.

마명 대사가 지은 책에는 대승기신론이 있습니다. 일어날 기(起)자 믿을 신(信)자, 대승의 믿음을 일으키는 그런 책입니다. 여러분들! 대승기신론(대승기신론)은 꼭 보tu야 합니다.

마명 대사는 대승불교의 할아버지라 할 정도로 우리가 숭앙합니다. 그런 분들이 염불을 역설 강조하셨단 말입니다. 제이의 석가라 할 수 있는 제 십사 대 조사인 용수 보살이 염불을 창도하고 마명대사께서는 염불을 그렇게 지성으로 우리한테 권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다 보셔서 아실 것입니다마는, 염불문으로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 가장 중요한 핵심 가르침입니다.

정토삼부경은 대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인데, 여러분들이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행복스러운가,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극락세계, 그것은 없는 세계가 아닙니다. 극락세계는 비단 저 십만억 국토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의 입장이 가벼워서 모든 존재의 실상을 볼 수 있는 투철한 안목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이 자리가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천지 우주는 모두가 다 극락세계입니다. 다만 중생이 자기 업장 따라서 보고 못 보고 또 많이 보고 적게 보고 그런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염불을 하는 데 있어서는 꼭 염념상속이라, 생각생각에 상속해야 합니다. 화두를 참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했다 말았다 했다 말았다 해서는 우리 마음이 삼매에 못들어갑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우리 범부가 바뀌어져서 성자가 될 것인데, 못 들어가면 범부는 성자가 못 되겠지요. 자기혁신을 해야 합니다. 자기초월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생각생각 생각생각에 끊임없이 지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심일경성이라 삼매에 들어갑니다.

삼매에 들어가면 여러분들이 생각할 수 없는 기기묘묘한 행복이 다 거기에 들어있습니다. 몸도 가벼워지고 마음도 가벼워지고, 평소에 모르는 것도 알아집니다. 우리 마음 자리가 본래 부처인데, 또 부처가 만공덕의 자리기 때문에, 부처의 자리에 우리가 걸음걸음 접근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한테도 그와 같은 부처의 공덕이 하나둘씩 차근차근 깊어지는 것입니다.

행복은 참 쉬운 것입니다. 원래로 행복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가 행복하기 위해서 금생에 나와서 우리가 고행을 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가 정말로 참다웁게 부처를 증명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인생고를 느끼면서 살아가는데, 다행히도 부처님 법 만나서 걸음걸음 지금 부처님한테 다가서고 있는 것입니다.

염불이라는 것은 우리가 삼매에 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 세속적인 생활에서는 그 마음이 오로지 하나로 모아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염불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일반 세속적인 명상같은 것은, 그때그때 머리가 좋아지고 몸이 날씬하고 예뻐지기 위해서 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의 유의법이라, 세간적인 중생들이 생각하는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고, 이것은 해탈의 공부가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성불 해탈의 공부입니다. 그래서 재가불자들께서는 비록 선방에서 공부는 못하시더라도 자기 집에서나마 염불공부를 지속적으로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불념이념(不念而念)이라, 생각지 않아도 저절로 염불이 나옵니다.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주무실 때도 역시 염불하다가 주무시고 말입니다.

장좌불와는 못하더라도, 공부를 하시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들어 버리면 잠든 가운데서도 공부가 됩니다. 또는 잠든 가운데 또 다른 망상을 했다가도, 일어나자마자 그냥 마음을 추스려서 또 염불을 하게 됩니다. 그때는 바람 불면 바람 소리도 염불하고, 또 시냇물이 흘러가면 시냇물 소리도 염불하고, 그러다가 나중엔 부처님 광명이 눈앞에 훤히 비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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