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법문-설우 스님<진불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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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법문-설우 스님<진불선원장>
  • /제주불교
  • 승인 2013.04.11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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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소외된 사람은 더욱더 외로워지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부처님의 평등한 자비사상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남긴 수많은 가르침 중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요? 저는 참선수행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참선수행의 사상이 가장 잘 정리된 경전 중 하나가 바로 『금강경』이라고 부르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입니다. 오늘은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고 그 속에서 참된 길을 가고자 하는 참선수행에 대해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금강경』은 선가(禪家)에서는 선경(禪經)이라 합니다. 조계종에서도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만큼 『금강경』은 선적인 의미가 깊이 담겨져 있는 대승경전입니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금강(金剛)은 다이아몬드를 말합니다. 금강이 가지고 있는 속성의 첫째는 ‘불변(不變)’입니다. 천 년을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둘째는 지구상의 어떤 물건도 다 끊어버릴 수 있는 날카로움을 말합니다. 일체의 잡스럽고 불필요한 문제들을 한순간에 벼락 치듯 끊을 수 있는 특성 때문에 금강이 날카롭고 번득이는 지혜를 비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금강의 불변성과 날카로움은 곧 반야지혜를 상징합니다.

또 금강은 항상 빚이 납니다. 마치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은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대통령이나 노숙자나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그것을 비춥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셈이지요. 편애하고 집착하거나 누구를 우선순위로 두는 중생심은 거울에 없습니다. 사실 그대로 드러내 보입니다. 거울은 어떤 귀한 것이 나에게 다가와서 지나갔다 하더라도, 절대 그 사물에 집착하지 않고 바로 비워버립니다. 바로 비워버리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물이 와도 그 사물을 정확하고 바르게 비춰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울과 달리 우리는 그러지 못합니다. 집착하고 편애하고,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반야지혜의 바라밀 실천을 못하게 막아버리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는 제목만 들어도 『금강경』이 주는 가르침이 참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금강경』은 600부 반야부 경전 가운데서도 가장 절묘하고 완벽하게 부처님의 반야바라밀 사상을 드러내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이 ‘사구게’입니다. 이중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 나오는 사구게가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 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 非相 卽見如來)’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참으로 빈 것은 이 허공과 같다는 것입니다. 허공은 비어 있지만 천상만상 모든 생명을 다 살려내고 있잖아요. 봄이면 봄꽃을 살리고, 가을이면 또 가을꽃을 살려내고, 다 절기에 맞게 알아서 모든 것을 조화롭게 이루고 있죠. 그것은 텅 빈 참진공의 위력이자 생명력입니다.

진공묘유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과 상통합니다. 색이 그대로 공이고, 공이 그대로 색이라는 얘깁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바로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에 있는 연기사상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연기는 무엇이죠? 관계성입니다. 어떤 생명이든지 그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은 서로간의 관계성을 유지하면서, 그 관계성 속에 항상 순환하고 있습니다. 인연이 모이면 연생이 되고, 또 인연이 다하면 연멸이 되고, 그래서 연생연멸(緣生緣滅)한다고 그러는 거예요. 연생연멸이라는 것이 연기법입니다.

이것을 부처님이 오셔서 발견하신 거예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바른 정법의 진리를 이해하게끔 만들어서, 번뇌와 탐진치와 중생업식으로 인한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끔 해주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합니다. 괴로움을 여의고 낙을 성취하는 거예요. 낙을 성취하려면 내가 내 자신의 마음을, 정체성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몸뚱이에 대한 속성과 정체성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연기법을 잘 알면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여기는 본래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었습니다. 이 빈 공간을 반야지혜가 있고 연기성을 잘 아는 사람이 본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사람은 여기에 자유롭게 공간을 만들기도 하고 또 만들었지만 여기에 집착하거나 여기에 얽매이지 않고 이것이 시절인연이 다하면 흩어져 없는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이 공간을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수없이 많은 물질을 만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 사람과 사는 일이 별 겁니까? 사람 사이의 관계, 사람과 물질의 관계 때문에 어려워하고 고민합니다. 사람들은 인간관계나 물질의 성취가 나에게 행복을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앞에 놓인 컵이 나에게 편리를 가져다주긴 하지만 언제나 나의 행복을 지켜줄 수 있습니까? 우린 다만 이 컵에 집착될 뿐입니다. 다른 어떤 물질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경계를 볼 적에 연기성의 원리를 알면 세상을 달리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든 물질이든 인연이 다하면 언제든 떠날 수 있고 나도 보내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마음은 거기에 평등하고 무심해질 수 있어요. 연기를 알면 그리된다는 겁니다. 왜냐? 집착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가족, 이웃과 마음이 안 맞아서 괴로워하고 혹은 그 관계에 집착합니다. 하지만 그런 괴로움은 실체가 없어요. 이렇게 생각하면 공이 공으로서만 빠지는 게 아니고 그 공은 항상 형상도 만들고, 형상은 그대로 공으로 돌아갈 수 있고, 이것이 아주 자유자재로 잘 오고갑니다. 이를 『금강경』에서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일라는 말을 더 절실하게 잘 드러낸 구절이 『금강경』마지막 32품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 있습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일체 모든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집착과 욕심 그리고 이에 따라 일어나는 고뇌와 번뇌는 모두 그림자, 꿈, 이슬, 아지랑이, 거품, 번개라.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여섯 가지 비유를 왜 말씀하셨냐 하면, 모든 것이 실체가 없으니깐 거기에 너무 집착하지 말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명확히 알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세상이 그림자, 꿈, 이슬, 아지랑이, 거품, 번개라고 해서 모든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불교가 아니에요. 허무주의일 뿐입니다.

‘일체유위법’이 ‘여몽환포영’이라고 알려준 것은 더욱더 자유롭게, 더욱더 나래를 펴고 확신에 차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심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 당당히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실현시키라는 가르침입니다. 세상이 연기한다는 것을 아는데 어찌 허무주의에 빠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범소유상 개시허망’입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다음에 ‘약견제상 비상 즉견여래’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제상은 모든 상을 말합니다. 제 앞에 있는 컵도, 마이크도, 꽃도, 책상도 전부 다 제상에 들어갑니다. 여러분도 저도 다 제상에 들어갑니다. 이 제상이 비상인 줄 알면 여래를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상이 상이 아닌지를 영원한 상이 아닌지를 알면 그것이 본질을 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상이 상이 아닌지를 안다는 것은, 없어진 다음에 아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 잘 볼 줄 아는 사람을 우리는 반야바라밀을 잘 실천하는 사람, 반야지혜가 아주 여여하게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물을 볼 때 사물과 동시에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지혜를 말하는 겁니다.

『금강경』을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은 이 경전을 보살인행을 가르치고 있다는 겁니다. 부처님의 본모습을 가장 수승하게 드러내는 자리가 보살인행입니다. 여러분들은 부처님의 과거생 이야기 『자타카(본생담)』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자타카』속의 보살행은 부처님이 이러한 사물의 본질을 알았고 그 본질을 알아 무한한 생명의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을 알았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타카』속의 보살행은 부처님이 이러한 사물의 본질을 알았고 그 본질을 알아 무한한 생명의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을 알았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타카』속에서 부처님은 생명에 대해 찬탄하고 상생을 도모했습니다. 부처님은 몸소 그런 보살인행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보리살타’를 줄여 보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보리라는 말은 반야지혜를 말하고 살타는 중생을 말합니다. 위로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입니다. 즉 부처님은 불성의 세계에서 머물지도, 그대로 열반에 집착하지도 아니하고, 중생을 위해서 교화하고 중생을 위해서 이타행을 하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화중생입니다.

중생이 왜 중생입니까? 하도 복잡한 걸 머리에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중생이라고 합니다. 쓸데없는 것들이 많다는 거예요. 무슨 쓸데없는 것이 많으냐? 생사업을 짓는 업식이 많다는 겁니다. 반야지혜가 있으면 짓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역으로 반야지혜가 없으면 하는 것마다 모두 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업은 많이 지고 있기 때문에 날 때마다 자꾸자꾸 반복해서 중생으로 나는 거예요. 그것을 끊을 수 있는 것이 금강반야바라밀의 사구게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 비상 즉견여래’입니다. 중생심으로는 도저히 불안하고 두렵고 자신 없어서 행하지 못하는 보살인행이지만 열리게 되면 믿기 어려운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또 반야지혜입니다.



지금까지 『금강경』안의 사구게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사실『금강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맨 앞인 제1분에 나와 있습니다. 제1분에 보면 부처님께서 공양할 시간이 되어서 25조 가사를 두르신 후 발우를 들고 사위성의 거리로 들어가 탁발을 하십니다. 일곱 집마다 한 집씩 들러 탁발을 마치시고는 기원정사로 돌아와 공양을 하고, 발우를 씻으시고, 발을 씻으시고, 좌복에 편하게 앉으십니다. 이 구절이 대단한 구절입니다. 이렇게 훌륭하고 불가사의한 내용이 없습니다. 의아해하실 분들도 있을 겁니다. 성스러운 경전 첫머리에 밥 먹고 발 씻는 것까지 시시콜콜 적었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 중에 자기는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이들에게는 바르게 앉아서 보라고 충고하는 부모님이 있을 겁니다. 그렇죠?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마이동풍입니다. 살아있는 교육이 아니기 때문이죠. 이게 잔소리입니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말을 많이 하고 강조해서 하지만 일상에서 그걸 전혀 행하지 않는 사람 말입니다. 부처님은 말로써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어떤 좋은 성인의 말씀을 끌어다가 가르치신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는 행동으로 몸으로 가르친 분이셨어요. 이런 내용이 많은 경전의 앞머리에 등장합니다.

학문적인 지식이나 철학적인 통찰로 불교를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보살인행이 함께하지 않으면 그것을 불교하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금강경』에서 강조해서 이야기하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실천입니다. 경전이나 사구게를 수지 독송한다고 하지요? 여기서 수지라는 말은 보살인행, 보살사상이 내 생활 속에 스며들어 일상화되어 자연스럽게 보살인격화됨을 말하는 겁니다. 저는 신도님에게 강의를 할 때 이 부분을 힘주어 이야기합니다. 『금강경』사구게를 실천하고 갖추려면 날이면 날마다 일선(一善)을 해야 한다고 말이죠.

우리가 항상 선행과 봉사로 공덕을 쌓아나감으로 인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색함과 에고, 집착 등이 다 떨어져나갈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도를 깨친다는 것은 허망한 생각입니다. 그런 건 있을 수 없어요. 진리를 알고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해나가야 복과 공덕이 함께 갖춰지지요. 복과 공덕이 평행선을 이루며 어느 지점에 다다랐을 때 도를 깨치게 됩니다. 부디 이런 가르침을 몸과 마음에 체화시켜서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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