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業)에 대한 작은 분석 경 (MN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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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業)에 대한 작은 분석 경 (MN 135)
  • /소치 김승석 엮음
  • 승인 2013.06.1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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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

2. 그때 바라문 청년 또데이야의 아들 쑤바가 세존께 찾아와서 절을 올리고 세존께 이와 같이 여쭈었다.

3. “세존이시여, 어떠한 원인과 어떠한 조건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들 사이에 천하고 귀한 차별이 있습니까? 세존이시여, 참으로 인간들은 목숨이 짧기도 하고 목숨이 길기도 하도, 질병이 많기도 하고 질병이 없기도 하고, 용모가 추하기도 하고, 용모가 아름답기도 하고, 권세가 없기도 하고, 권세가 있기도 하고, 빈궁하기도 하고, 부유하기도 하고, 비천하기도 하고 고귀하기도 하고, 우둔하기도 하고 현명하기도 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원인과 어떠한 조건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들 사이에 천하고 귀한 차별이 있습니까?”

4. “바라문 청년이여, 중생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중생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5. 이처럼 말씀하시자 바라문 청년 쑤바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들어 올리듯,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존께 귀의합니다.

또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수행승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재가신도로서 저를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 바쳐 귀의하겠습니다.”



《해설》

■쑤바의 아버지 ‘또데이야’는 꼬살라 국의 빠쎄나디 왕의 사제(司祭)였음에도 지독한 구두쇠로 살아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자신의 집의 개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주석서에 의하면, 세존께서 개로 하여금 쑤바의 아버지가 죽기 전에 묻어 둔 보물을 파내도록 해서 쑤바에게 그 개가 전생의 아버지임을 확인시켰는데, 이에 감동을 받은 쑤바가 세존께 업에 대해 질문을 하자 본경을 설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업(Kamma)이란 의도적인 행위인데, 몸[身]과 말[口]과 뜻[意]으로 의도하고서 선업 또는 불선업을 짓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업이라고 하는 것은 조건입니다. 마치 씨앗을 심으면 적절한 흙과 습기를 만나 발아해서 싹이 트고 그 종자에 고유한 열매가 열리듯이 의도적인 행위는 그 의도한 선(善) · 불선(不善)의 성질에 따라 각각 고유한 특성을 갖고 열매를 맺습니다. 여기서 열매란 업의 과보라는 의미이고, 줄이면 업보(業報)와 같은 말입니다.

■세존께서는 중생들의 윤회, 재생이라는 것은 인과적 생성원리에 따라 업에 의지하여 업보로부터 모태와 태어날 곳이 생기는 것일 뿐이고,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있어서 그 업보에 따라서 태어날 곳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업보에 업이 없고, 업에 업보가 없어서 그 둘은 각각 공하지만 업이 없이는 업보가 없다’는 말씀과 동일합니다.

■한편 불변하는 아뜨만(자아)이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재육화(再肉化)하는 것을 윤회라고 보는 힌두교에서는 전생의 업이 금생의 나를 결정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힌두교의 교리에는 이 마음이 ‘나’이고 ‘나의 것’이라는 성품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믿는 전도된 견해, 즉 아상(我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자아(아뜨만)라는 것은 실체가 없어서 공(空)한 것이고, 현재의 이 몸뚱이는 과거의 업보를 소유함과 동시에 현재의 업에 의해 새롭게 바뀌어가는 상속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업의 경(SN35:146)」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업을 ‘오래된 업’과 ‘새로운 업’의 개념으로 구분하여 설하셨습니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기나긴 생사여로의 과정에서 선업은 진정한 동반자로서 친지와 같으므로, 몸이 아플 때 의사를 의지처로 삼듯 선업에 의지하여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선한 업을 가지고 있을 때는 그를 둘러싼 환경 역시 훌륭합니다. 중생들의 업이 좋고 나쁨은 그들의 근본 마음과 연관됩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 자만 등이 과도하다면 업은 자연히 좋지 않는 방향으로 기울게 됩니다.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비록 윤회에서 삼악도, 악처에 떨어지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살생하면 단명하고, 남을 해치면 질병이 많고, 화내고 성내면 용모가 추하고, 질투가 심하면 권세가 없고, 보시하지 않으면 가난하게 되고, 완고하고 오만하면 비천해지고, 착하고 건전한 업을 모르면 우둔한 자로 태어난다고 설하셨습니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업은 성숙하는 시간에 따라서 금생에 받는, 다음 생에 받는 업, 받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는 업 등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되지 않는 한 자기가 지은 업은 반드시 언젠가는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죽은 뒤 천도재를 지내는 것보다 임종 직전에 그가 지은 선업, 특히 바라밀공덕을 기억해내도록 유도하거나 마지막 순간에 좋은 생각을 일으키도록 불교의 호스피스 활동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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