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법문<현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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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법문<현문스님>
  • 정리=강석훈 기자
  • 승인 2005.03.10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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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는 안락하고 평온하다



현문스님은 지난 64년과 70년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사미계와 비구계를 각각 수지하고 같은 해 통도사 승가대학 대교과를 졸업했다. 스님은 통도사 규정·총무국장, 표충사 주지, 통도사 자장암 감원, 조계종 중앙선관위 위원, 불교TV 이사 등을 역임했다.

최근 현문스님은 일제시대 당시 통도사 주지를 지냈던 김구하 스님이 비밀리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음을 증명하는 자료를 발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공개한 자료들은 독립자금 관련 영 수증 5장, 안창호 선생 등 10명에게 자금을 지원했음을 나타내는 ‘사변시(3·1운동을 지칭) 출금증’ 등으로 구성돼 있다. 최근 열반재일을 맞아 통도사에서 ‘진정한 열반의 의미’를 주제로 법문한 내용을 지면에 옮겨 싣는다. <편집자>



   
 
  영축총림 통도사 주지 현문스님  
 
바야흐로 봄의 전령이 온다는 입춘을 지나서 개구리도 깨어난다는 우수·경칩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통도사의 경내에도 1월 초부터 피던 매화가 한창 꽃망울을 본격적으로 터트리면서 봄기운이 가득 넘쳐나고 있습니다.

지난달은 국내 최대의 명절인 설날도 있었으며 삼동결제를 회향하는 해제도 있었으며, 강원의 졸업식과 더불어 선방에서 참구하던 납자와 강원 학인들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운수(雲水)의 길을 떠났습니다. 텅 비어 버린 듯한 총림의 경내엔 겨우내 얼었던 계곡물이 녹아 흐르는 개울물 소리와 새 소리만 적료할 뿐입니다.

이번 달은 부처님의 출가일(음력 2월 8일)과 열반일(음력 2월 15일)이 함께 들어 있는 달인만큼, 부처님 열반일을 맞이하여 ‘진정한 열반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이 지향한 마지막 경지는 해탈하여 열반(니르바나)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열반은 대체 어떤 경지일까? 그 모습을 말로 설명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선은 ‘평온한 경지’라고 정의를 해 봅시다. 우리들의 생활은 평온과는 정반대 되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경제가 어려운 요즈음 생활고는 물론이요, 우리 인간은 ‘사고팔고(四苦八苦)’라는 생로병사의 근본 괴로움을 짊어진 존재입니다. 이런 고달픔에서 벗어나는 것, 해방되는 것이 바로 해탈이며, 열반인 것입니다.

열반이란 괴로움이 일어나는 근본 원인인 그릇된 집착, 끝없는 욕망을 없애고서 체득해 가는 경지이므로 청정행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열반은 행동을 통해서 점차 알아가는 것이지, 말로 설명하여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 초기 대승경전인 밀린다왕문경이란 경전에서 나가세나 장로와 그리스 사람인 메난드로스(밀린다)왕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왕이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손발이 잘려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손발이 잘리는 괴로움을 알고 있을까요?”

“존자여, 그렇습니다. 그들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알고 있을까요?”

“존자여, 다른 사람이 손발이 잘릴 때에 지르는 비통한 신음소리를 듣고서 손발이 잘리는 일은 괴로움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대왕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아직 니르바나를 얻지 못한 사람이라도 니르바나를 체득한 사람들의 음성을 듣고 니르바나는 안락하다고 하는 것을 압니다.” <밀린다왕문경>

나가세나 장로에 의하면 보통 사람들이 괴로움을 알고 있듯이 평안이라는 존재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평안을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나 이처럼 바쁘고 소란스러운 오늘날에는 사람은 어딘가에 있을 평안을 더욱더 찾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 평안은 욕망을 충족시켜서는 얻을 수 없으며, 오히려 욕망을 없앰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식별하여 마음에 드는 사물에 대한 욕망이나 탐욕을 제거하는 것이 불멸의 열반의 경지이다.”

“어떠한 소유도 하지 않고 집착해서 취하지도 않는 것, 이것이 가장 안전한 섬(의지처)이다. 그리고 그것을 열반이라고 부르며, 늙음과 죽음이 사라진 경지이다.” <숫타니파타>

부처님은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쾌락에 대하여 집착하는 일과, 사물의 소유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을 그르다고 질타하고 계십니다. 이 경전구절을 음미해보면 열반이라는 것은 현실생활로부터 유리된 초월적인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무욕과 무집착을 실천하는 가운데 열반은 실현되는 경지임을 느끼게 됩니다.

분명 욕망을 채우느라 혈안이 되어 있는 동안에는 안락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무욕과 무집착이 이어지도록 하고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실현되었을 때 사람은 안락함을 느낍니다. 이와 같은 안락한 경지가 늙음과 죽음까지 소멸되는 경지라면 그때 맛보는 안락함은 또 얼마나 위대한 것일까?

“으뜸가는 진리의 경지에 도달하여 모든 세계에 대해서 구하는 일이 없는 그는 죽음을 술퍼하지 않는다. 불이 붙은 집에서 탈출한 사람처럼.” <테라가테>

번뇌는 흔히 불이 타오르는 상태로 비유하는데, 그 불이 꺼진 상태를 열반으로 표현합니다.

“거대한 불덩어리가 타오르고 있어도 장작이 없으면 꺼져버린다. 타다 남은 것이 있어도 ‘불이 꺼졌다’라고 말한다.” <테라가타>

이러한 번뇌의 불이 꺼지면 고요한 마음상태로 돌아옵니다. 그것은 고도의 초월적인 심경이 아니라 깨달은 안락하고 평화로운 마음의 경지인 것입니다. 그것을 선수행자들은 “평상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번뇌를 뛰어넘고 생사를 넘어섰다고 하는 호기어린 마음상태가 아니라 자기를 제어하고 번뇌를 조절해 가면 자연히 마음이 고요하게 정화되고 늙음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떠나가는 것입니다.

후세에 이르면서 열반은 범부들이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고차원의 경지처럼 인식되지만 부처님이 법을 설하였던 시절에는 열반이란 오직 번뇌가 사라진 곳, 불사(不死)의 경지, 평온, 안락, 적멸을 의미하였고, 일상에서 체득한 경지를 말하였다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열반은 종종 저편 언덕, 피안에 비유됩니다. 고뇌로 가득 찬 이편 언덕에서 안락하고 평온한 저편 언덕인 피안으로 건너간다고 하는, 깨달음과 해탈을 비유할 때 쓰는 언어입니다.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을 도피안(到彼岸)이라고 하고, 바라밀다라고 음역하고 있습니다.

이번 달은 부처님 열반재일이 있는 달입니다.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말끔히 꺼 버리고 지혜를 증장시키는 청정행을 닦아 적멸의 세계에 도달하시기를 바랍니다. 수시로 칠불통게의 법문처럼 “모든 악한 일을 그치고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여 뭇 선을 행하여 나가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듯이 그대로 행하여 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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