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잘라 경 (SN3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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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잘라 경 (SN35:63)
  • /소치 김승석 엮음
  • 승인 2013.10.1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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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에 머무셨다.

2. 그때 미가잘라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미가잘라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3. “세존이시여, ‘혼자 머무는 자, 혼자 머무는 자’라고들 합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혼자 머무는 자이고 어떤 것이 동반자와 함께 머무는 자입니까?”

4. “미가잘라여,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만일 비구가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으면 그가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기 때문에 즐김이 일어난다. 즐김이 있으면 탐닉이 있고, 탐닉이 있으면 속박이 있다. 미가잘라여, 이처럼 즐김의 족쇄에 얽매여 있는 비구를 동반자와 함께 머무는 자라 부른다.”

5. “미가잘라여, 이와 같이 머무는 비구는 비록 그가 조용하고 소리가 없고 한적하고 사람들로부터 멀고 혼자 앉기에 좋은 외딴 처소인 숲이나 밀림의 거처에 머무르더라도 동반자와 함께 머무는 자라 불린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갈애가 바로 그의 동반자이고 그는 그것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반자와 함께 머무는 자라 불리는 것이다.”

6. “미가잘라여,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만일 비구가 그것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있지 않으면 그가 그것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있지 않기 때문에 즐김이 소멸한다. 즐김이 없으면 탐닉이 있고, 탐닉이 없으면 얽매임이 없다. 미가잘라여, 이처럼 즐김의 족쇄에 얽매어 있지 않는 비구를 혼자 머무는 자라 부른다.”

7. “미가잘라여, 이와 같이 머무는 비구는 비록 그가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과 왕들과 왕의 대신들과 외도들과 외도의 제자들과 섞여서 마을의 안에 머무르더라도 그는 혼자 머무는 자라 불린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갈애가 바로 그의 동반자인데 그는 그것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머무는 자라 불리는 것이다.”



《해설》



녹자모(미가라마따) 강당을 건립하여 세존과 승단에 시주하신 분이 위사카 청신녀인데, 그의 아드님이 미가잘라 존자입니다.

세속에서는 자신의 배우자를 동반자라 부르며,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출가수행자들에게는 갈애가 동반자입니다. 출가수행자의 길을 걸어도 갈애와 사견(邪見)의 반죽에 물들어 있다면, 세존께서는 그를 혼자 머무는 자라고 할 수 없다고 설파하셨습니다.

‘홀로 있음’이라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고요한 숲속이나 고즈넉한 산사에 있더라도 온갖 세상사에 대한 생각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온갖 세상일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마음의 평온함을 잃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혼자 머무는 자’라 부를 수 있습니다. 유마경의 주인공 ‘유마’거사가 그런 분이겠지요.

반면에 고요한 숲속이나 고즈넉한 산사에 머무르면서 명상수행을 하더라도 제멋대로 날뛰는 마음을 조절하지 못하면 그런 사람은 홀로 머무는 자라 할 수 없습니다.

‘홀로 있음’은 일종의 마음 작용입니다. 고요한 숲속에 머물던 또는 시끌벅적한 도심에 살든 욕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홀로 머무는 자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내게 고뇌이고 종기이고 재난이며 질병이고 화살이고 공포임을 반조해서 여기서 두려움을 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합니다.

6가지 감각기관[六根]과 6가지 감각대상[六境]이 부딪칠 때 반드시 아는 마음[識]과 함께 느낌이 함께 일어납니다. 이때 아는 마음(알음알이)은 그냥 대상을 받아들여서 문제가 없지만 그 대상을 본 뒤에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느낌으로 성숙되면 갈애가 일어나서 항상 문제를 일으키고 괴로움을 낳습니다.

하지만 알아차림(sati)이 있으면 대상과 아는 마음 사이에 어떤 번뇌도 침투하지 못해 청정하다고 합니다. 감각기관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은 대상이 나타나면 나타난 즉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림은 현장성(here)과 즉시성(now)이 있어야 합니다. 알아차림이 있으면 갈애가 일어나지 않고 그냥 맨 느낌의 상태로 있게 되어 번뇌라는 도둑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물위에 떠있는 공과 같아야 합니다. 물 위에 떠있는 공은 물에 빠지지 않고, 그렇다고 물위로 튀어 오르지도 않고, 항상 물과 함께 있습니다.

화두가 번뇌를 불태우는 불꽃이고, 분별을 잘라내는 칼날로 작용하듯이, 알아차림은 오염원으로부터 마음을 지키는 여섯 감관의 수문장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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