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법문<태백산 각화사 고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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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법문<태백산 각화사 고우스님>
  • 정리=강석훈 기자
  • 승인 2005.03.28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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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자기존재의 위대함 깨쳐야”



   
 
   
 
고우스님은 1937년 성주에서 태어나 1958년 청암사에서 서옹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고, 1963년 범어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관응스님, 고봉스님, 혼해스님 등 근현대 선지식 아래에서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을 수학한 고우스님은 1968∼9년 봉암사 결사의 선풍을 재건해 종립특별선원의 초석을 다졌다. 봉암사·축서사·금영사·용주사 등 40여 년 동안 제방 선원에서 참선정진한 고우스님은 현재 태백산 각화사 선덕으로 주석하고 있다. 지난 19일 부산 범어사에서 열린 10대 선사 초청 ‘설선대법회’에서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 참선수행’을 주제로 한 고우스님의 법문 내용을 지면에 옮겨 싣는다.

<편집자>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말인데, 사실은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한번에 다 알기는 힘들지만, 우리가 조금씩 이해하면서 그것을 생활에 적응해 나가다보면 무언가 얻어지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때문에 불교에 대한 이해 즉, ‘정견(正見)’을 세우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이라는 말은 ‘깨달은 분’이라는 뜻인데, 도대체 부처님은 어떤 존재이기에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가. 그런데 깨달은 분과 우리는 실제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효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 차이를 이해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동시에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나를 쳐다보고 또 내 밖의 세상을 쳐다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형상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어떤 물건의 형상만 쳐다보면서 ‘좋다 나쁘다, 이것은 우수하다 또는 열등하다, 이것은 귀한 것이다 천한 것이다’라고 분별을 합니다. 그 형상만 쳐다보는 사람을 부처님은 장님으로 표현합니다. 장님은 길을 걸을 때 어디에 부딪히거나 넘어지기도 하고, 상처도 많이 입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눈만 장님이 아니라, 귀, 코, 입도 그처럼 돼서 자신과 주변의 가까운 사람, 사회, 국가, 세계를 함께 학대하게 됩니다. 이것이 중생과 부처님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삽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남의 허물을 보지말고, 자기 허물을 보아라.” 육조스님은 남이 나를 화나게 만들더라도 자기가 화를 내지 않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과 우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자기를 어떻게 보고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부처님은 형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하나를 더 보십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이라’ 합니다. 이 몸뚱이와 정신을 반야심경에서는 ‘개공’이라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은 형상 외에 ‘공(空)’을 더 보시는 것입니다. 이 공을 보게 되면 이미 눈을 떴기 때문에 길을 가면서 어디에 부딪히거나 넘어질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시골에 가면 새끼나 가마니, 짚신이 있습니다. 이것을 만들어진 형상이라고 했을 때 이것에는 그 재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짚입니다. 그러면 짚의 입장에서 보면 새끼나 가마니나 짚신이나 똑같습니다. 이 짚신이 반야심경에서 얘기하는 ‘공’입니다. 중국의 운문스님은 그렇게 된 사람은 “매일 매일 좋은 날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 짚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생활화하면서 체험하고 공부하는 것, 이것이 곧 불교이고 수행이며 우리가 행복한 삶을 걸어가는 길입니다. 이렇듯 불교는 알고 보면 간단한 것이며, 이해하는 데도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떤 시각으로 생활화하고 수행해 나가야 하느냐. 오온이 개공한 줄 알고, 나의 짚은 무엇인지, 이것을 이해하고 생활에 적용하면서 참선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봉사를 하든지, 이렇게 차근차근 수행해갈 때 행복을 느끼면서 생활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공이라 하고, 짚이라 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햇빛이 쨍쨍 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햇빛은 어째서 났겠습니까. 구름이 없으니까 햇빛이 난 것입니다. 형상만 보고 비교하면서 시비분별하는 그 마음이 이 햇빛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하지 않습니까. ‘진공’은 구름이 걷힌 것, 비교하는 마음이 없어진 것이며, ‘묘유’는 햇빛이 난 것을 말합니다. 누구보다도 지혜롭고 이해심 많고 비교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렇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공을 만드는 것이 문제인데, ‘나’라는 존재뿐 아니라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존재든, ‘연기(緣起)’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연기는 글자 그대로 인연이 모여 가지고 형상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집을 예로 들어 말씀드리자면, 집은 한 천가지 재료가 모여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실제 집이란 말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세월이 흘러 집이 허물어진다면, 그것은 집이 없어진 게 아니라 그 재료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공이라 합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색(色)이 공(空)이고, 공(空)이 색(色)이다’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먼저 이해하고 실제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공부를 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즉 정견을 세워야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면서 매일 매일 좋은 날을 살 수 있는 존재 원리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오늘 당장 자기 존재원리의 위대함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모르고 가치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 이 얼마다 억울한 일입니까. 그런 존재원리는 모두에게 보편화 돼 있고 모든 것이 평등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수행을 어떻게 해 나가야 되느냐. 티벳불교는 수행방편에다 자기 생활을 갖다 맞춥니다. 그래서 참 보기는 좋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되면 고정화 돼 버릴 수도 있을 우려가 있습니다. 그럼 우리 선수행은 어떻습니까. 생활에다 선을 스며들어가게 합니다. 앞서 얘기한대로 비교하지 않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고 또 차별되는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거기에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런 생활로 만들어 가는 것이 선입니다. 바로 이런 점이 다릅니다. 능엄경에서는 손가락과 달 얘기가 나옵니다. 달이 진리고, 손가락은 그 진리를 보라고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수행방편에 생활을 맞춘다는 것은 이 손가락에다 맞추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선불교는 애초에 달을 얘기해놓고 생활 속에 스며들어 그것을 달로서 생활하게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불교가 다른 나라 불교보다는 한 차원 높다고 생각합니다. 틱낫한 스님의 ‘화’라는 책이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공감을 얻었는데, 부처님이 말씀하신 달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과연 달이 화를 내겠습니까. 부처님은 절대 화를 내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화를 내지 않는 대신에 연민으로 반응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연민은 낮춰보거나 불쌍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너도 부처고 나도 부처이며 너의 존재원리나 나의 존재원리나 모두 같은데, 너는 너라는데 집착해서 화도 내고 남에게 욕도 하고, 자기도 학대하고 남도 학대하지만, 그 원리를 모르고 화내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여러 불자님들이 내 존재원리가 그렇게 위대하게 돼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이해한다면, 오늘부터 화를 낸 것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생활에서 조그마한 것에서부터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수행따로 공부따로 해서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모두 부처님 마음이 될 것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정견을 세워 그것을 생활에 하나 하나 실천하면서 공부도 같이 병행해 나갈 때 그 공부가 비로소 성취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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