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류 경 (SN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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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류 경 (SN 1:1)
  • /소치 김승석 엮음
  • 승인 2014.04.2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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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

2. 그때 어떤 천신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온 제따 숲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왔다. 다가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께 이와 같이 여쭈었다.

3. “세존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하여 폭류를 건너셨습니까? ”도반이여, 나는 멈추지 않고 모으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류를 건넜노라.“

4. “세존이시여,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멈추지 않고 모으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아서 폭류를 건녔습니까? ” “도반이여, 내가 멈출 때 나는 가라앉아 버렸다. 도반이여, 내가 모으려고 아등바등할 때 나는 휩쓸려나가 버렸다. 도반이여, 이처럼 나는 멈추지 않고 모으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류를 건넜노라.”

5. 천신이 이렇게 게송을 읊으셨다.

“멈추지 않고 아등바등하지 않으면서

세상의 집착을 뛰어 넘어

참 열반을 성취한 거룩한 님을

참으로 오랜만에 친견하네.“



《해설》



• 불교에서는 윤회의 바다에서 생사가 거듭되는 것을 거센 흐름[暴流]에 비유합니다. 반면에 열반은 그러한 거듭되는 윤회가 끝나 파도가 마치지 않는 해안을 뜻합니다.

• 주석서에 따르면, 존재를 존재의 영역에 가라앉게 하고 보다 높은 정신 상태나 열반으로 향하게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거센 흐름이라고 비유하는데, 여기에는 네 가지 폭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 그 첫 번째가 감각적 욕망의 폭류[欲流]입니다. 이는 오감을 통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을 말합니다. 그 두 번째가 색계와 무색계에 대한 집착이라고 부르는 존재의 폭류[有流]입니다. 그 세 번째가 선(禪)을 갈망하는 상견(常見)과 함께 하는 욕망과 62가지 견해가 견해의 폭류[見流]입니다. 그 네 번째가 무명의 폭류[無明流]인데, 이는 사성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를 번뇌라 부르기도 하고 속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주석서에 따르면, 본경에서 ‘멈추지 않고’라 함은 오염원 등 때문에 머무르지 않거나 가라앉지 않는다는 뜻이고, ‘아등바등하지 않고’라 함은 애쓰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의 삶이란 때로는 멈추고 애쓰는 것이 필요한데, 세존께서는 본경에서 양(兩) 극단을 버리고 중도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세존께서는 번뇌(오염원) 때문에 머물러서도 안 되고, 조건적인 발생이나 의도적 형성에 매이지 않도록 애써서도 안 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 그런 취지에서 주석서에서는 일곱 개의 쌍(雙)으로서 세존의 교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 번뇌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조건적 발생과 의도적 형성 때문에 애쓰게 되고 휩쓸리게 된다. ② 갈애와 사견(邪見)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나머지 오염원들과 업(業) 형성력 때문에 애쓰게 되고 휩쓸리게 된다. ③ 갈애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견해(=邪見) 때문에 애쓰고 휩쓸리게 된다. ④ 상견(常見)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단견(斷見) 때문에 애쓰고 휩쓸리게 된다. (여기서 상견이라 함은 자기 원인설에 바탕을 둔 인과의 동일성에 근거하여 ‘모든 것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영원주의의 입장을 뜻하고, 단견이라 함은 타자 원인설에 바탕을 둔 인과의 차별성에 근거하여 ‘모든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 입장을 뜻합니다.) ⑤ 게으름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들뜸 때문에 애쓰고 휩쓸리게 된다. ⑥ 쾌락의 탐닉에 몰두함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자기학대에 몰두함 때문에 애쓰고 휩쓸리게 된다. ⑦ 모든 해로운 업(業) 형성 때문에 머물고 가라앉게 되고, 모든 세간적인 유익한 업(業) 형성 때문에 애쓰고 휩쓸리게 된다.”라고…

• 세존께서는 마음이 머무는 곳이요 천착하는 곳이요 잠재하는 곳으로서 갈애와 사견을 으뜸으로 강조하셨습니다. 여기서 갈애라 함은 대상을 좋아해서 생기는 것을 뜻하고, 사견은 대상을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잘못 알아서 생기는 것을 뜻합니다. 갈애 때문에 마음은 대상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사견 때문에 마음은 대상을 거머쥐기 위해 애쓰고 휩쓸리게 됩니다.

• 이 세상을 조건 지어진 것,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연기관입니다. ‘제행무상, 제법무아‘란 연기법의 다른 표현입니다. 세존께서 연기를 깨달았기 때문에 폭류를 건너 피안에 이르셨습니다. 연기에 사무치면 존재의 공성(空性)을 알고 보게 되어 경계에 끌려 다니지 않고 휘둘리지 않아서 머물고 휩쓸리지 않은 마음의 평화가 저절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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