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의 지식승 원문상 스님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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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공간의 지식승 원문상 스님은 누구?
  • 김봉현 기자
  • 승인 2005.04.02 1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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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승이자 투철한 교육자



   
 
   
 
원문상(1908∼1950)은 1945년 해방당시 제주불교의 중추적인 청년승려이자 교육자였다. 불교혁신운동을 주도하고 민중계몽을 위한 교육사업에 열정을 쏟은 인물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에 휘말려 생을 마감함으로써 우리 기억에서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다.

원문상 스님은 1908년 서귀포시 하원동 469번지에서 가난한 포목상인 부친 원춘생과 모친 송씨의 2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경오이고 관명이 문상이다. 아호가 초당이고 법호는 만허당이다. 하원소학교를 졸업후 서울로 상경, 고학했다.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 출신, 한글학회 회원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20대 중반 고향 하원리에 돌아와 ‘소년명진회’를 조직, 낮에는 강습소, 밤에는 야학을 열어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등 계몽운동을 전개한다. 이후 1940년 경 경북 토함산 기림사에서 출가 삭발했다. 장기간의 서울생활로 중앙의 동향에 밝았던 그가 해방을 맞으면서 중앙과 지역불교의 가교역할을 자연스럽게 맡는다. 실제로 8·15해방 직후 출범한 조선불교혁신회가 전국승려대회 개최를 각 지방에 홍보하는 과정에서 원문상의 역할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것은 45년 10월경 원문상의 상경과 귀도 직후에 제주불교청년단과 준비위원회가 조직됐고, 또 제주에 불교적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한 그가 1945년 12월 2∼3일 관음사 제주읍내 포교당인 대각사(前관음사 중앙포교당)에서 열린 ‘조선불교혁신 제주불교승려대회’의 부의장을 맡아 이일선, 오이화 스님등과 함께 불교혁신을 주장한 중심인물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 대회 이후 중앙에 파견될 제주대의원으로 만장일치 추대된 점에서도 그의 당시 위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제주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백양사와 대흥사 계열의 알력다툼으로 종무활동에 한계를 느낀 그가 모든 소임을 내던지고 1947년 고향인 하원으로 돌아와 중문중학원에서 교육자의 길을 걷던 중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1950년 7월 7일 서귀포 경찰서 ‘공무원 구속자 명부’에 의하면 그는 ‘좌익사상 극렬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결같이 투철한 민족주의자라고 증언했다. 그를 시기한 전문규라는 서북청년단의 모함으로 희생됐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희생 당시 43세였다.

속가의 동생 원인상도 제주법화종 원로로 활동했던 혜관스님(1917∼2000)이다. 중문중학원과 부문중학교 교사시절 그에게 수학한 많은 제자들(조명철 강통원 고정필 이치근씨 등)이 스승과의 인연탓인지 같은 교육자의 길을 걸어 제주교육계의 원로들이 되었다.

근현대사의 가장 혼란했던 시기, 해방공간에서 청년승려로서, 투철한 교육자로서 분명한 삶을 살았던 그의 넋은 아직도 우리곁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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