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를 만났을때 나를 깨우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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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만났을때 나를 깨우쳐라”
  • 정리=강석훈 기자
  • 승인 2005.04.1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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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엄사 선등선원장 현산 스님  
 
현산스님은 1943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1961년 도천스님(현 화엄사 조실)을 은사로 출가했고, 1964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전강·경봉·구산·춘성스님 등 제방선원의 조실스님들을 모시고 40여 년간 수행정진한 현산스님은 1978년 조계총림 송광사 유나를 시작으로, 제방 선원의 입승·선덕·한주 등을 역임했고, 현재 화엄사 선등선원장과 조계종 전국선원 수좌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지난 2일 범어사에서 열린 ‘간화선 대중화를 위한 10대 선사 초청 설선대법회’에서 ‘자비와 지혜를 조화롭게 닦는 선수행’을 주제로 한 현산스님의 법문을 지면에 옮겨 싣는다.



선(禪)의 도리는 공(空)의 도리입니다. 금강경의 도리가 선의 도리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소의경전으로 택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바탕은 공입니다. 우리 몸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합니까. 그런데 인도 갠지스강의 모래인 항하사 같은 한량없는 몸으로 보시하고 아침나절, 점심저녁으로 보시를 해서 무량 백천만억겁을 몸으로 보시하는 것보다도, ‘금강경’을 듣고 믿는 마음이 거슬리지 아니하면 그 복이 더 빼어나리라 하는 것입니다. 즉 선의 도리를 믿는 사람은 무한한 부처님 처소에 선근을 심고 또한 그런 공덕을 받을 자이기 때문에 그 공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게 됩니다.

임제종 양기파의 원조인 양기 방회선사께서 선방수좌였을 때의 일입니다. 방회선사가 자명스님을 모시고 지냈는데 공부가 잘 안 되더랍니다. 그럴 때마다 자명스님께 “어떤 것이 선입니까”하고 물어보면, 스님은 “나는 자네보다 못하네. 스스로 깨닫게나”하고 말씀하셨답니다. 또 한참 공부하다가 “어떤 것이 도입니까”하고 다시 물어보면 자명스님께서는 “나는 자네보다 못하네. 스스로 깨닫게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은 자명스님을 모시고 가다 좁은 길을 만나게 됐는데, 그 때 화두를 들고 가다가 간절히 깊은 생각이 솟아올라 자명스님에게 묻기를 “스님, 이 자리에서 일러주십시오. 일러주시지 않으면 스님을 한 대 치겠습니다”하니까 자명스님이 목에 힘을 주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자네만 못하네. 스스로 깨닫게나.”

이 말에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이 말이 법을 일러준 것이 아닌데 방회선사는 지극한 신심으로 도를 구하고, 선을 구하는 지극한 마음 때문에 깨달은 것입니다. 신심이 지극하면 바로 도원(道原)이라. 신심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은 도의 어머니입니다.

옛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모든 물질을 볼 때 수행자는 항상 마음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주장자가 물질이라면 어떤 것이 마음이며, 이것이 마음이라면 어떤 것이 물질이겠습니까. 마음이면서 물질인 것이 항상 나타나거늘 물질을 제쳐놓고 마음을 찾으려고 하다 보니 그것이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선을 알고자 하거든 세 가지에 다 드러나 있다, 무엇이냐. 색(色)이란 물질이고, 성(聲)은 소리, 언(言)이라는 것은 말, 이 주장자가 바로 선입니다. 주장자 소리가 바로 선입니다. 산승이 말하는 이것이 바로 선입니다.

이 선의 길이라는 것은 생각으로 무엇이다 짐작하면 그건 틀린 것입니다. 바로 이 말을 듣는 그 자리가 환하게 드러나야 됩니다. 이런 것을 생각으로 따지고 분별하면 안 되는 법입니다.

어느 날 두 스님이 깃발을 보고 “깃발이 움직이느냐, 바람이 움직이느냐”를 놓고 해결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육조스님이 “바람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요, 깃발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요,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요”라 했습니다. 아주 쉬운 말 같지만 이 말이야말로 격식과 종파를 뛰어넘는 소리입니다.

법안선사가 육조스님의 이 말씀을 평하시길 “그것은 마음을 깨달은 이의 경계를 나타낸 바다. 바로 이렇게 마음을 보고 한 소리지 절대 딴 곳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육조스님의 깨달은 바를 바로 표시한 말이다”라고 했습니다. 선이라는 것은 바로 막힌 곳을 뚫어서 알아야지, 분별로 헤아려서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렇게 막힌 것을 뚫어내는 것이 선이지, 이리저리 따지면 선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말입니다.

최근 많이 일어나고 있는 지진뿐만 아니라, 물이 넘치거나 불이 솟구쳐 많은 사람들이 운명을 달리 했습니다. 이렇게 언제 불어닥칠지 모르고 불안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한 줌의 재가 될 몸뚱이를 나라고 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을 내 마음이라 본심이라 착각하고 천년만년 살 것 같이 목에다 힘줘 ‘나’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때려부수는 것이 ‘금강경’의 도리요, 선입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 잘난 남자나 여자도 다 소용없습니다. 여러분의 본심체를 깨닫는 이 선의 도리, 한량없는 선근이 없으면 선의 도리를 믿지 않습니다. 물질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자리에는 지혜의 눈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냐”하고 물으니, 임제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지금 내 법문을 듣는 여러분이 부처다”하고 답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부처입니다. 온갖 일을 다 분별하고 생각하는 신통력이 갖춰져 있는 여러분의 그 마음자리,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보살이 함께 배우는 것이 이 마음을 배우는 것이고, 모든 부처님이 증득한 것이 이 마음을 증득한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이 표현한 것이 이 마음을 표현한 것이고, 일체 중생이 미혹한 것은 이 마음이 미혹한 것입니다. 일체 수행자들이 깨닫는 것이 이 마음을 참구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이 뭣꼬, 이 뭣고’하는 그 간절한 생각이 여러분을 행복의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가장 가깝게 있는 내 면목을 깨달아야 여러분의 참 행복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참 지혜가 드러나고 나날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당당한 대도여, 밝고 밝아 분명함이로다.” 당당한 대도란 무엇을 뜻하는가. 지금 법문을 듣는 여러분의 본심체가 ‘탁’ 드러날 것 같으면 일체세계에 두루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 자리를 당당대도라 합니다. 밝고 밝아 분명함이란 것은 모든 삼라만상 일체세계가 그 빛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차별이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입니다. 한 생각을 ‘탁!’하고 깨뜨리는 것이 선입니다. 항하사 같은 신명으로 보시하고 또 보시하더라도 이 법을 믿는 마음을 거슬리지 않을 것 같으면 공덕이 수승하다 했는데, 지금 여러분은 생명을 바쳐서 공부를 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부처님 제자일 것 같으면, 이것을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성과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무한 자비가 솟아오르고 무한 지혜가 본래 다 갖춰져 있어서 죽는 것조차 영원한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싸우고 다툴 까닭이 없습니다. 큰 원력을 가지고 세상을 크게 보세요. ‘지금까지 내가 내 일을 못하고 미혹하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으며 윤회하며 살아왔던가. 부처님의 위대한 법, 이 법을 만났을 때 내가 나를 깨달아야지.’ 이런 간절한 마음을 내고 또 내었을 때 가정과 사회, 나라가 행복해질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중생이라도 품어 안아 자비로 다스려서 고통을 면해주고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 부처님과 같은 이런 자비심을 실천할 때 모든 업이 녹아지고 지혜가 상승하며 공부가 뚫리게 되는 것을 여러분은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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