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디야 경 (AN4: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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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디야 경 (AN4:193)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5.03.06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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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한때 세존께서는 웨살리(왓지 족의 수도)에서 큰 숲 속의 중각강당에 머무셨다.

그때 끄쌰뜨리야 가문의 󰡐밧디야󰡑가 세존께 다가가서 절을 올리고 곁에 앉아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사문 고타마는 요술쟁이다. 그는 개종시키는 요술을 알아서 다른 외도들을 제자로 개종시킨다.󰡑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사온데 이들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한 것입니까?



󰡒보라, 밧디야여, 그대는 소문으로 들었다 해서 나의 말을 따르지 말라.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게 들었다고 해서, 우리의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해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밧디야여, 󰡐그대 스스로 이러한 법들은 해로운 것이고, 비난받아 마땅하고, 지자(知者)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고, 이러한 법들을 전적으로 받들어 행하면 손해와 괴로움이 있게 된다.󰡑라고 알게 되면 그때 그것들을 버리도록 하라.󰡓



󰡒밧디야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의 내면에서 탐욕, 성냄, 어리석음, 폭력이 일어나면 그것은 그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손해가 되겠는가?󰡓󰡒손해가 됩니다. 세존이시여.󰡓



󰡒밧디야여, 심한 탐욕, 성냄, 어리석음, 폭력 등을 가진 사람은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얼이 빠져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는 것을 갖고, 남의 아내에게 접근하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또 다른 사람마저도 그렇게 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면 이것은 오랜 세월을 그에게 손해와 괴로움이 되지 않겠는가?󰡓󰡒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밧디야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의 내면에서 탐욕 없음, 성냄 없음, 어리석음, 폭력 없음이 일어나면 그것은 그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손해가 되겠는가?󰡓󰡒이익이 됩니다, 세존이시여.󰡓



【해설】



석가모니 부처님은 신(神)도 아니고, 신의 예언자나 그 화신(化身)도 아닙니다. 그 존귀한 분은 자기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궁극적인 자유와 일체 지(智)를 얻어서 천신(天神)과 인간들 가운데에서 견줄 이 없는 스승[無上師]이 된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시고 가르친 법[담마]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입니다. 법[담마]의 대의(大義)는 크게 교학, 진리로서의 법(전자)과 물질과 정신의 현상으로서의 법(후자)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 후자 가운데, 부처님께서는 유익하거나 해로운 법들, 나무랄 데 없는 것과 나무라야 마땅한 법들,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법들을 간택하는 지혜[擇法覺支]를 계발할 것을 권장하셨습니다. 아비담마(논장)에서는 유익한 법[善法]과 해로운 법[不善法]의 구별 기준을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느냐의 여부에 따라 정했는데, 본경에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해로운 법들이고, 비난받아 마땅하고, 지자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고, 이러한 법들을 전적으로 받들어 행하면 손해와 괴로움이 있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종교, 다양한 철학, 다양한 규범과 관습이 있습니다. 잘못된 택법(擇法)이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을 정신적 혼란에 빠트리고 감각적 쾌락의 미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다양함 속에서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어떤 것을 거부해야 하는지에 대해 세존께서 그 척도 또는 근거를 제시한 것이 바로 본경의 가르침이십니다. 그밖에 「깔라마 경」(AN3:65)도 같은 취지입니다.

세존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사이에 법담을 나눌 때 늘󰡒수타마야 치타마야 바바나마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라, 와서 누구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나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자세히 살펴보고, 비판하고, 따져보고 나서 내가 설한 해탈에 이르는 방법을 실행하라. 이 방법을 충분히 익히면 누구든지 나처럼 진리를 직접 보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불법에는 창조주로서의 신(神)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 창조주의 자리에 우주 삼라만상에 두루 통하는 인과법칙과 법적 질서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일체의 중생들의 삶에는 법적 질서가 일관되게 작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상호 의존적 원인-결과관계의 끊임없는 흐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윤회의 고리의 원인을 업(Kamma)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업이 현재라는 조건들을 만들어내고, 오늘 짓는 업은 앞으로 있을 조건들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업의 원리는 힌두교의 숙명론이나 기독교의 예정론과 정반대가 됩니다. 업이란 매순간 이어지며 생성되는 의식의 총체적 힘이므로 ‘지금, 여기서’ (자유의지에 따라서) 선업을 쌓음으로써 나쁜 과보를 피할 수 있고, 또 몸이 무너져 죽은 뒤 그들의 정신적 향상의 정도에 따라 천상계, 인간계 또는 하위의 축생계와 지옥에 태어나지만, 팔정도의 도 닦음의 완성을 통해 정신적 오염원(번뇌, 삼독심)을 멸절시키고 윤회가 없는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불교가 지향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본경에서󰡐밧디야󰡑는 세존의 가르침에 귀의하고, 찬탄하면서 본경의 말미[생략함]에 크샤트리아인 자신의 혈육과 친족들까지 개종시키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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