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차곳따 삼명 경 (MN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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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차곳따 삼명 경 (MN 71)
  • /제주불교
  • 승인 2015.06.25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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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웨살리 큰 숲의 중각강당에 머무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시고 웨살리로 탁발을 가던 중, 방향을 바꿔 유행승들의 원림으로 왓차곳따 유행승을 만나려 가셨다.

3. 왓차곳따 유행승은 멀리서 세존께서 오시는 것을 보시고 환영의 인사를 드리고 자리를 만드셨다. 세존께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고, 그 유행승도 다른 낮은 자리를 잡아서 한 곁에 앉았다.

4. “세존이시여, 제가 어떻게 설명해야 세존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는 것이고, 거짓으로 세존을 헐뜯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이유로도 이 주장이 비난받지 않겠습니까?”

5. “왓차여, ‘사문 고따마는 삼명(三明, 세 가지 명지)을 가진 자이다.’라고 설명하면 그대는 내가 말한 대로 말하는 것이고, 거짓으로 나를 헐뜯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이유로도 이 주장이 비난받지 않을 것이다.”

① “왓차여, 나는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할 수 있다. 즉 한 생, 두 생, …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宿命通].

② “왓차여, 나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天眼]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 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妻]에 가는 것을 본다. … 나는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 가는 것을 꿰뚫어 안다[天眼通].”

③ “왓차여, 나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 ․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례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문다[漏盡通].”

6.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왓차곳따 유행승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왓차곳따] “고따마시여, 재가자의 삶의 족쇄를 버리지 않고도 몸이 무너진 뒤에 천상에 태어난 자, 또는 괴로움을 끝낸 재가자가 있습니까?”

[세존] “왓차여, 재가자의 삶의 족쇄를 버리지 않고도 몸이 무너진 뒤에 괴로움을 끝낸 재가자는 아무도 없다. 다만, 백 명뿐만 아니라 이백, 삼백, 사백, 오백 명, 아니 더 나아가 훨씬 많은 재가자들이 재가자의 삶의 족쇄를 버리지 않고도 몸이 무너진 뒤에 천상에 태어났다.”

【해설】

어리석음(moha)을 뜻하는 무명(無明)의 반대말이 명지(明知, vijjā)입니다. 불교적 용어로서 명지라 함은 ‘알게 하는 것’, 또는 ‘어둠을 밝히는 광명’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신족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의 육신통(六神通) 가운데 본경에 나타나는 숙명통(=전생을 기억하는 지혜), 천안통(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 누진통(=모든 번뇌를 멸진하는 지혜)의 셋을 세 가지 명지, 즉 삼명(三明)이라 합니다.

본경에서 ‘괴로움을 끝낸 자’라 함은 아라한, 즉 다시 태어나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재가자도 10가지 족쇄를 끊으면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혹 드물게 재가자가 아라한이 된다하더라도 아라한이 되면 즉시 출가하거나 바로 반열반에 드는 길 밖에 없다고 초기경전의 주석서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재가자로 아라한이 된 후 측시 출가한 예로는 야사 존자와 케마 비구니 등이 있습니다.

10가지 족쇄라 함은 ① 유신견, ② 계금취, ③ 의심, ④ 감각적 욕망, ⑤ 적의, ⑥ 색계에 대한 탐욕, ⑦무색계에 대한 탐욕, ⑧ 자만, ⑨ 들뜸, ⑩ 무명을 말하는데, 이 10가지 족쇄 를 얼마나 많이 풀어냈는가와 연결 지여 네 부류의 성자, 즉 예류자-일래자-불환자-아라한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아비담마 문헌에서는 열 가지 족쇄 가운데 처음의 셋(①②③)을 보아서[見道] 버려할 족쇄로, 나머지는 닦아서[修道] 버려할 족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①②③④⑤)를 풀면 불환자가 되어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정거천에 태어나 그곳에서 일정 기간 수행을 한 후에 열반을 성취한다고 하는데, 본경에서 세존의 교설이 바로 이 점을 말씀하셨다고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왓차곳따 유행승은 라자가하(왕사성)의 부유한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나 바라문의 율법에 따라 수행을 하였는데, 부처님을 뵙고 여러 차례 법문을 듣고 나서 마침내 출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한 후 아라한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면서, 다수의 국민들은 물질문명의 수혜를 듬뿍 누리고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무한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어느 시대보다 삶에 대한 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연기된 현상들에 대하여 자기 동일시하고, 거기에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자신을 존재로 머물게 하는 족쇄를 씌우는 업력으로 작용합니다.

출가자들이 머무는 절집에서조차 사사공양(四事供養) 이외에 장엄 불사라는 의미를 부여하며 세속화의 길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 우리 불교의 현주소입니다. 열반은 자기를 버리고 현실적 삶에 대한 의미 부여가 끝나야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그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을 끊고 그 가르침대로 열반을 향해 정진, 또 정진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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