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성지순례<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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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성지순례<下>
  • 유지선법사(선재학교 교장)
  • 승인 2005.05.23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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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지기르·쉬라비스티·바이샬리·쿠시나가르까지



"오직 진리를 위해 정진하라"

라지기르서 사리불·목건련 등 붓다께 귀의해

쿠시나가르 사라쌍수 아래서 대열반에 들어



   
 
   
 
샤르나트에서 초전법륜을 설하신 후 붓다는 다시 보드가야로 향한다. 보드가야에 도착한 붓다는 불을 섬기던 카샤파 3형제를 교화하여 1,000명의 제자를 얻게 되며, 붓다는 다시 마가다국의 수도 라지기르(왕사성)로 온다.

붓다께서 라지기르로 오신다는 소문을 들은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은 붓다를 손수 맞이하며 붓다의 제자가 된다. 또, 왕은 카란다카 장자의 땅을 희사 받아 불교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베누만 비하르)를 지어 공양하게 되는데, 붓다께서는 이 곳에 오래 머무르시며 진리를 널리 펴시게 된다. 라지기르는 붓다의 큰 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 등 유능한 제자들이 귀의한 곳이기도 해 붓다에게는 남다른 곳이었다. 하지만, 이 곳이 불교의 성지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붓다께서 수많은 경전을 설하셨다는 영취산과 불교 최초의 경전 결집이 이루어진 칠엽굴이 있기 때문이다. ‘영취산’이란 이름은 산마루가 독수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산 정상에 벽돌로 쌓은 조그만 향실(香室)터가 복원되어 있다. 이 곳이 바로 붓다께서 법화경, 무량수경, 보적경… 등 수많은 대승경전을 설하신 영산회상(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궁중 음악인 영산회상은 이 곳에서의 설법회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의 현장이다. 영취산을 내려와 바이바하라 산 정상에 오르면 ‘쌉다파르니’라는 곳이 나오는데, 이 곳이 바로 불교 최초로 경전이 결집된 칠엽굴이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로 시작되는 경전의 시작은 25년간 지극히 붓다를 모셨던 아난다 존자가 붓다의 설법에 대한 내력과 내용을 말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결집을 위해 모인 500명의 비구들은 마치 붓다께서 살아오신 듯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마가다국과 함께 북 인도의 가장 큰 세력이었던 코살라의 수도 ‘쉬라바스티’에는 붓다 당시 프라세나짓 왕의 궁궐터인 ‘마헤드’가 숲 속의 폐허로 남아 있다. 오랜 시간 속에 묻혀 지금은 그 흔적조차도 찾기 힘들다. 1863년 영국의 ‘커닝햄’의 발굴로 남북 350m, 동서 230m에 달하는 현재의 기원정사 유적지인 ‘사헤드’가 발굴되었다.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기수급고독원’이라는 곳이 바로 이 곳이다. 그 옛날 이 곳은 코살라국의 태자 제타(기타)의 소유지였지만, 수닷타(급고독)장자라는 한 장자의 신앙심에 감동 받아, 그 동산을 희사하여 승원이 세워진 것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즉, 기원정사는 제타태자의 동산에 급고독장자가 세운 절이라는 뜻이다. 기원정사는 초기 불교 교단 형성의 주춧돌로서 최초로 이루어진 왕사성의 죽림정사와 함께 2대 정사로 꼽힌다. 이 기원정사는 불교교단의 사원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으며, 붓다의 45년 교화 기간 중 무려 19회(사위성에서의 5회 포함 총 24회)의 우안거(雨安居)를 지내면서 붓다께서 가장 오래 머물던 곳이기도 했다. 오늘날 한국의 불자들이 가장 많이 독송하는 ‘금강경’을 비롯한 많은 경전이 이곳에서 설해졌다. 또한, 쉬라바스티는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지명이라 더욱 더 정감이 간다. 쉬라바스티라는 지명을 한자로 옮기면 신라벌(新羅伐)이라고 표기되는데, 이 말을 우리말로 하면 서라벌이 되며, 서라벌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국호였던 신라의 수도이고, 현재의 수도인 서울의 어원이 서라벌이라고 하니 지금의 서울과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또 다른 성지 바이샬리는 고대 인도의 중, 북부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로 일찍부터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릿차비족의 수도로 ‘세계 최초의 공화제’가 시행되던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성지와 마찬가지로 한가롭고 조용한 시골마을일 뿐이다. 그 옛날 바이샬리의 주민들은 말을 잘 타고 장사에 밝아 부자가 많았으며, 원색의 옷을 즐겨 입었다고 하는데, 진보적 성향이 강해 뒷날 이 바이샬리에서 불교 교단이 대중부(대승)와 상좌부(소승)로 분열이 일어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배경 때문일 것이다.

바이샬리는 ‘원후봉밀지’의 성지로도 유명한 곳인데, 원숭이들이 붓다께 꿀을 공양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현재 바이샬리의 유적에는 사원지와 함께 원숭이가 붓다를 위해 팠다는 연못도 남아 전한다. 또 이 사원지는 인도 전역에 세웠던 아쇼카 왕의 석주가 유일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바이샬리는 최초의 비구니가 탄생한 곳이며, 재가의 상징 유마거사가 살던 곳이며, 선재동자의 이야기로 유명한 화엄경 ‘입법계품’이 설해진 대림정사 중각강당이 있던 곳이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인지 두 번째 결집은 라지기르에 이어 바이샬리에서 이루어진다.

   
 
   
 
45년간 쉬지 않고 길에서 전법을 펴신 붓다께서는 80세가 되어 이 곳 바이샬리에서 열반선언을 하시게 된다. 바이샬리에서 쿠시나가르로 향하는 길목 ‘비마세나 카팔라’언덕에서 붓다는 걸음을 멈추고 바이샬리의 여기 저기를 둘러보며 말씀했다.

“내가 이 아름다운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 것이 마지막이로구나.”

얼마나 붓다께서 이 바이샬리에 대한 생각이 남달랐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붓다께서는 열반 선언 후 쿠시나가르로 향한다. 쿠시나가르로 향하던 붓다는 대장장이 춘다의 공양을 마지막으로 병을 얻으시게 된다. 지치고 힘든 몸으로 아난다의 도움을 받으며 쿠시나가르에 도착한 붓다는 서로 마주 서있는 사라나무 아래에 이르러 열반에 들게된다. 아난다에게 두 그루의 사라 나무 사이 북쪽으로 머리를 향하게 하시고,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 자리를 마련하도록 한 붓다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발을 포개어 모로 눕는다. 두 그루의 사라 나무 사이에 누운 붓다는 최후의 말씀을 남긴다

“너희들은 오로지 진리를 위해 게으름 없이 정진하여라.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천한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힘써 정진하라.”

쿠시나가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보잘 것 없이 작은 시골이다. 그런데 붓다는 왜 이런 보잘 것 없는 쿠시나가르까지 와서 열반에 드셨을까? 한 곳에 정착해서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 인연 닿는 대로 한평생 길 위에서 지내시던 붓다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길 위에서 태어나 길 위에서 설법하시고 길 위에서 열반하신 붓다께서는 말씀하신다.

“붓다시여 이제까지는 누구라도 붓다를 뵙고 싶으면 직접 뵙고 여쭈어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붓다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는 우러러 볼 곳이 없으니 저희는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붓다께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의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내가 열반에 든 뒤에도 사람들이 나를 생각하며, 신심을 낼 만한 곳이 네 곳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곳, 깨달음을 이룬 곳, 처음으로 법을 설한 곳, 대열반에 든 이 곳을 보면서 나를 생각하고 신심을 낼 것이니라.” <장아함경, 유행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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