왁깔리 경 (SN 2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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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깔리 경 (SN 22:87)
  • /유현 김승석 엮음
  • 승인 2016.06.2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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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무셨다.

2. 그 무렵 왁깔리 존자는 중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려 오랫동안 세존을 친견할 수가 없었다. 간병하는 비구를 불러서 세존을 뵙고 이 사정을 말씀드리고 세존께서 친히 문병을 와주시기를 말씀드려달라고 간청하였다.

3. 세존께서 이 사실을 들으시고 연민을 일으켜 왁깔리 존자에게로 가셨다.

[세존] “왁깔리여, 어떻게 견딜 만한가? 그대는 편안한가? 괴로운 느낌이 물러가고 더 심하지는 않는가?”

[왁깔리] “세존이시여, 저는 견디기가 힘듭니다. 편안하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세존을 친견하러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몸에는 세존을 친견하러 갈만한 힘마저도 없습니다.

[세존] “왁깔리여, 그만 하여라. 그대가 썩어문드러질 이 몸을 봐서 무엇 하겠는가?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왁깔리여, 법을 볼 때 나를 보고 나를 볼 때 법을 보기 때문이다.”



【해설】



왁깔리 존자는 사왓티의 바라문 가문 출신으로 베다에 능통한 자인데 처음 부처님을 뵙자 32가지 대인상을 가지신 세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존 가까이 있고자 출가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앓고 있는 병상에서도 부처님을 뵙고 싶은 그 마음이 간절하여 문병와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세존께서 연민을 일으키시고 병문안을 가셨는데, 왁깔리 존자가 여래의 몸을 친견하지 못함을 자책하자 세존께서 진정 부처님을 뵙기 위해서는 여래의 몸(육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깨달으신 법을 봐야 한다는 뜻에서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라고 사자후를 토하셨습니다. 이어서 세존께서는 왁깔리 존자에게 부처님이 체득하신 무상·고·무아의 법을 봐서 깨달음을 실현해야 진정으로 부처님을 보는 것이라고 상세하게 설법을 하셨습니다. (단, 지면 관계상 생략합니다.)

금강경에도 본경의 가르침이 전승돼 나타나고 있습니다. “형색으로 나를 보거나[若以色見我] 음성으로 나를 찾으면[以音聲究我] 삿된 길을 걸을 뿐[是人行邪道] 여래를 볼 수 없나니[不能見如來] 마땅히 부처님을 법성으로 보라.[應觀佛法性]”

부처님이 깨달으셨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무시는 법(法, dhamma)은 교학으로서의 사성제와 수행으로서의 팔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청정도론’을 위시한 주석서에 의하면, 교학으로서의 법을 온(蘊), 처(處), 계(界), 근(根), 제(諦), 연(緣)의 여섯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일부 선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 이외에 별도의 길[敎外別傳]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교학으로서의 법 공부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학으로서의 법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서도 열반으로 인도하는 다른 길이 있다고 보아 그 길로 나아간다면 마치 토끼 뿔을 찾는 것과 같아서 해탈, 열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사성제, 즉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볼 수 있는 법안(法眼)을 갖추어야 합니다. 고(苦)와 그 고(苦)가 갈애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하나, 그리고 고(苦)의 그침 곧 열반과 고(苦)의 그침에 이르는 길, 즉 팔정도 다른 하나, 이렇게 둘로 사성제를 봐야 한다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는데 그 가르침은 숫따니빠따의 『두 가지 관찰 경(Stn3:12)』에 실려 있습니다.

사성제 공부는 ‘법을 알고 도를 얻었다’는 말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 법이란 연기법을 말하고, 그 도란 팔정도를 말합니다. 12연기가 전개되면 생사윤회의 고(苦)가 생깁니다. 반대로 12연기를 역관(逆觀)하면 그 고(苦)가 멸하게 됩니다. 즉 이 몸을 다시 안 받으려면 집착[取]이 없어야 하고, 집착이 없으려면 갈애[愛]가 없어야 하고, 갈애가 없으면 그 다음의 고리들인 명색 ⇒식 ⇒행 ⇒무명이 순차적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그 기나 긴 여정의 의지처가 되어 주는 것이 바로 팔정도입니다. 요약하면 계(戒)-정(定)-혜(慧) 삼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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