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전등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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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전등사 (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4.14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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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36)

전등사 답사는 서문보다 남문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전등사를 둘러싸고 있는 삼랑성(정족산성) 네 개의 문 중 사용되는 문은 동문과 남문인데, 문루가 남아있는 곳은 남문이 유일하며 그곳이 일주문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전등사로 올라가는 길도 여느 사찰들처럼 길 양쪽에 식당과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가게 입구 옆에는 군밤을 구워 파는 이들의 좌판이 있다. 밤을 굽는 구수한 냄새에 이끌려 발길을 늦추는 순간 군밤장수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한 봉지 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한 순례자라면 내려오면서 사겠다고 하거나 눈인사로 대신한다. 도시처럼 북적이지 않아 정겨운 느낌도 들지만 여전히 속세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데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성벽이 방음벽이 되어 바깥 세계의 소란스러움을 막는다. 게다가 눈앞에 펼쳐진 호젓한 산속 풍경에 비로소 속세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일주문이 속세와 불국토를 구분하는 상징인 것처럼 전등사 입구의 삼랑성 성문은 일주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전등사 답사는 다음 〈남문으로 시작하는 답사 코스〉를 따르면 전등사의 중요한 곳은 대부분 볼 수 있다. 물론 개인의 관심사와 체력에 따라 어느 한 곳에만 머물거나 몇 곳을 빼도 좋다.    

남문에서 시작하는 답사 코스
⑪ 남문 ⑬ 양헌수비 ⑨ 대조루  ① 대웅보전 ⑥ 향로전 ④ 약사전 ③ 명부전 ⑤ 삼성각 ⑥ 취향당 ⑦ 정족사고 ⑧ 고려가궐지 ⑫ 종각 ⑩ 종루 ⑮ 화장실 뒤 설법전 아래 무설전  

남문(⑪)에서 주변에 드문드문 서있는 수령이 수백 년 된 은행나무들과 사람들이 쌓은 작은 돌탑을 보며 올라가면 양헌수비(⑬)로 가는 갈래 길이 나온다. 양헌수비는 비각 안에 있어서 비문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비를 통해 자신이 찾은 곳이 150년 전 제주목사였던 양헌수장군이 강화도에 침략한 프랑스군을 물리친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양헌수비에서 되돌아 나와 조금 위로 올라가면 대조루(⑨)의 지붕이 보이는 가파른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올라가 대조루 밑을 통과하면 작지만 당당한 대웅보전(①)이 눈앞으로 확 다가선다. 대웅보전 옆으로는 평평하게 다져진 마당을 중심으로 여러 채의 절집들이 늘어서 있고, 그 뒤에는 짙은 녹색의 멋들어진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아늑한 느낌이 든다. 

대웅보전은 약사전(④)와 함께 전등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보물로 지정된 문화유산이다. 1600년대 초 선조와 광해군 때 두 번의 큰 화재로 전등사의 대부분 절집이 소실되고 난 이후 지어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전등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가장 먼저 대웅보전을 떠올리게 된다. 이렇게 대웅보전이 유명한 이유는 대웅보전의 건축 양식 때문이 아니라 바로 건물 지붕 네 귀퉁이를 떠받치고 있는 벌거벗은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 지붕 귀퉁이를 떠받치는 인물이 만들어진 사례도 없지만 신성해야 할 절집에 불경스럽게 벌거벗은 나부상을 조각했다는 것이 더 눈길을 끌었을 것이다. 이 조각에 대해 원숭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나부상이라는 의견이 더 받아들여진다. 나부상은 두 팔을 모두 들어 처마를 받치는 모습, 한 팔만 든 모습, 옷을 벗은 모습, 옷을 걸친 모습 등 제각각 다르게 조각되었다. 이 나부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1600년대 초 화재로 대부분 건물이 소실된 이후 전등사에서는 외지에서 뛰어난 목수를 초청하여 대웅보전 건축을 맡겼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와서 꽤 오랜 기간 동안 일을 하던 목수는 인근에 있는 주막을 드나들다 그곳의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목수는 대웅보전 불사가 끝나면 경치 좋은 데에 집을 짓고 같이 살자는 주모의 말을 믿고 돈이 생기는 대로 모두 그녀에게 맡겼다. 공사가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바쁜 일정 중에 모처럼 시간을 내어 주막에 찾아가보니 주모는 그동안 맡긴 돈을 가지고 사라져버렸다. 이웃에 사는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주모가 며칠 전에 야반도주했는데, 찾을 생각은 아예 말라는 것이었다. 목수는 돈도 돈이지만 믿었던 여인에 대한 배신감에 화가 치밀어 일도 손에 안 잡히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방황하다 겨우 마음을 잡고 공사를 마무리했는데, 대웅보전 처마 네 귀퉁이에는 전에 보이지 않던 지붕을 떠받치는 벌거벗은 여인이 만들어졌다. 

대웅보전을 건축한 목수는 어떤 생각에서 나부상을 조각하였고, 그것을 보고 당시 전등사 스님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전하는 전설이 맞다면 나부상은 욕심에 눈이 멀어 사랑을 배신한 여인을 징계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무거운 지붕을 받치는 것처럼 평생 참회하며 살라는 용서의 마음도 담겼을 것이다. 오늘날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그러한 전설을 통해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당시 스님들이 불경스러운 조각을 허용한 이유가 아닐까?

전등사에 가면 대웅보전의 나부상을 보며 자신의 삶은 부끄러움이 없었는지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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