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곡 일타 큰스님의 “해인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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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곡 일타 큰스님의 “해인삼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6.14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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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향수필

몇 달 전 골동품가게를 운영하는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어느 노부부가 사는 허름한 집에서 낡은 액자를 싸게 구입했는데 잘 알려진 서예가 글씨는 아닌 듯싶고 묘하게 쓰인 글씨라서 필자보고 한번 감정해달라는 것이다. 내가 전문 감정인도 아니고 게다가 서예에 입문한 바도 없는데 봐달라는 것은 30여년간 이 분야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고 특히 고승과 명인과의 평소 교류가 많았으며 그 만큼 소장한 작품이 어지간히 있다는 걸 이 양반이 알고 있어 나한테 부탁을 한 것 같다. 

며칠 후 이 가게를 찾아 감정을 부탁한 낡은 액자를 보여주는 순간 섬광이 비치듯 놀라운 글씨, 특히 평소 내가 그렇게 소장하고 싶었으나 찾지 못했던 동곡 일타 큰스님의 “海印三昧”글씨였다. 

액자는 비록 헐었지만 글씨자체는 내용처럼 티끌 곰팡이 없이 깨끗하게 보존이 잘 돼 있었는데 이 글이 누구의 작품인지 어떤 내용인지 모르는 가게 주인에게 스님에 대한 소개와 그 뜻을 나름대로 설명해주었다. “海印三昧”는 큰스님께서 생전에 좋아하시던 법문 가운데 하나이다.

“진흙 속에 연꽃이 피나 그 모습이 깨끗하여 때묻지 아니하고 해인삼매, 즉 잔잔한 바다에 만상이 영인되듯 선정은 안심의 진리”의 내용이라는 해석을 해주었더니 감동을 받았는지 한참 생각하다가 이 귀한 작품은 역시 조원장이 주인인 것 같다며 선뜻 나에게 주는 것이다. 정말 묘한 인연이다. 일타 큰스님과의 인연은 20여년전 약천사가 준공되면서 맺어졌다. 

상량식때 전국에서 많은 불자들이 운집했는데 동양 최대의 대웅전이라는 대불사의 스케일도 있겠지만 일타 큰스님의 평소 대원력, 그 모습을 친견하러온 불자들이 거의인 것으로 보였다. 

나에게 기회이자 행운인 것은 그 대불사에 필자가 기념식과 이어서 불자 연예인들이 공연하는 산사 음악회까지 진행을 맞게 된 것, 여법하게 1부 진행을 끝내고 저녁에 2부 공연사회를 보게 됐는데 당시 건강이 좋지 않은 큰스님께서 공연장을 찾아와 끝까지 자리를 지키시며 수고한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던 모습, 당시만 해도 일타 스님이 어떠한 스님인지도 잘 몰랐던 터라 그저 평소 뵙는 스님인줄로만 알았던 그분이 바로 이렇게 인연의 끈을 이어주고 계시는구나 싶어 이 액자를 표구사에 맡겨 새 액자로 수리를 해놓았다. 

일타 큰 스님, 충남 공주 출생으로 고경 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하셨고 강원도 오대산 서대에서 혜암 스님과 함께 생식과 장좌불와로 하안거를 마친 뒤 적멸보궁에서 하루 3천배씩 7일기도와 손가락에 연지연향 발원용맹정진으로 유명하다. 

조계종 전계 대화상을 역임 한 뒤 1999년 세수 71세 법랍 58세로 입적하신 일타 스님은 외할아버지, 부모, 누나, 형, 외삼촌 등 일가족 41명이 출가한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종단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요직을 맡아 정법의 기틀을 마련하셨으며, 30대의 젊은 나이에 대법사로 추앙받아 전국 주요사찰에서 걸림없는 법문으로 중생을 교화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여러 선원에서 하안거 동안거 결제에 한 차례도 거르는 일이 없으셨다고 한다. 

1983년 간경화라는 난치병에 걸렸으나 죽음을 넘어선 정진으로 더 큰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셨는데 1992년부터 불자들의 올바른 신앙생활을 안내하기 위한 집필에 몰두 법어집인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등 20여권에 가까운 불서를 냈다. 

지금은 뵐 수 없지만 해인삼매 이 인연의 글씨로 필자는 큰스님의 대원력과 가피를 이어가고자 정진 또 정진할 것이며 우리 중생 곁에 다시오셔서 밝고 맑은 미소 꼭 보여주시기를…….

/조인석 (혜향문학회 회원·사회복지법인 춘강‘어울림터’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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