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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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6.2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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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지난 현충일 추모의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산이 봄의 옷을 벗고 여름옷으로 갈아입으려  지난여름에 입었던 옷을 세탁하려 내리는 빗물인가를 생각 해 보면서…
 해마다 오월 말이면 선작지왓과 백록담 남벽에 철쭉꽃이 만개하여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데 지난겨울이 추웠을까, 올 봄이 너무 가물어 그런가. 올해는 유월 첫째 일요일 남벽에 들렸는데 아직도 철쭉은 봉우리만 들고 게으름을 피우며 핑계를 댄다. 일곱 날이 지난 오늘은 게으름을 피울 핑곗 거리가 없으니 온 산이 붉게 물들었으리라 
남벽에 피어났을 철쭉을 보려 오늘은 영실로 산길에 들었다. 이른 아침 산은 봄의 옷을 벗고 여름옷으로 갈아입으며 엷은 구름으로 살짝 살짝 몸을 감춘다. 아랫도리옷을 다 갈아입었을까 돌계단을 다 올라 관객이 관람석에 앉으니 신령은 하늬바람을 불러 무대의 구름을 걷어내며 연극의 1막을 시작한다. 늘 그렇듯 오늘도 무대의 주인공은 병풍바위와 오백나한이다. 
아! 신령이 사는 신령의 방, 영실은 한 번 앞을 바라보면 두 번을 뒤 돌아보게 한다. 부처가 왔다는 불래오름과 한라산의 서남쪽의 초록이 너무나 황홀하다.
선작지왓의 드넓은 초원을 보려고 다시 숲길을 걷는다. 숲길을 걷고 돌계단을 힘들게 올라와 관객이 관람석에 앉으면 연극의 1막이 오르고, 다시 숲길을 20여분 걸어야 연극의 2막을 시작하는, 그게 이 산길의 매력이다. 숲길을 막 벗어나니 선작지왓의 철쭉꽃이 엷은 구름으로 거품을 내며 몸단장을 하여 관객을 맞으며 연극의 2막을 시작한다. 아직도 백록은 두터운 구름을 쓸어안고 있다.
아침에 북쪽에서 바라본 산은 안개가 끼어 그런가. 어리목으로 올라온 관객이 드물어 윗세오름의 관람석이 한가롭다. 허기진 배를 달래고 일곱 석을 함께 예매한 일행은 연극의 3막을 관람하려 남벽으로 향한다.
아직도 백록은 두터운 구름을 쓸어안고 있어 남벽을 처음 본다는 일행에게 남벽을 보여주지 못하면 어쩔까 하며 계곡을 지나 구상나무의 솔향을 맡으며 숲길을 벗어나니 하늬바람이 남벽에 두터운 커튼을 좌에서 우로 밀어내며 연극의 3막을 시작한다. 눈을 좌우로 움직여야 다 볼 수 있는 백록의 거대한 남벽이 그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아직도 남벽에 철쭉은 메마른 봉우리를 들고 온 산을 다 덮은 조리대 숲에서 지난주와 같은 모습으로 어렵게 서있다. 지난 현충일에 내린 비로 충분한데, 철쭉이 온 산을 다 덮은 조리대 숲에 기를 잃었다면 서서히 남벽의 철쭉은 모습을 감출지 모르겠구나.  
온 길을 다시 뒤 돌아가며 구상나무의 숲길을 지나고 계곡을 건너 남벽을 뒤 돌아보니 백록은 다시 두터운 구름을 쓸어안고 있다. 오늘의 산은 참으로 묘하고 신비로운 산이구나. 숲길을 벗어나니 그 찰나에 맞춰 구름이 걷히고, 그 구름이 걷힌 찰나에 어찌 내 눈이 그곳에 있는가.
그 산길은 수 없이 다녀왔지만 道可道 非常道 도를 도라 하면 참된 도가 아니요. 산을 산이라 하면 참된 산이 아니다. 오늘 나는 이 산을 처음 다녀왔다.

 

/고수향(사단법인 붇다클럽 한라회 오름등반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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