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실상부한 학승의 귀결점은 종단의 인재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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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부한 학승의 귀결점은 종단의 인재양성
  • 이병철 기자
  • 승인 2017.07.1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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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의 주춧돌, 당신을 모십니다 <4-2> - 태고종 원로위원·금붕사 주지 수암 스님 -

태고종 원로위원이자 금붕사 주지 수암 스님은 세수 70세를 훌쩍 남긴 초로에도 공부에 대한 열정만큼은 젊은이들 못지않다. 이번 호에는 한국불교 태고종단의 대표적 학승으로 꼽히는 수암 스님을 두 번에 걸쳐 지면에 모신다.  <편집자 주>

 

40여년의 배움의 열정이 아직도 식지 않은 수암 스님.

수암 스님은 5년의 교양강의에 이어 본격적으로 중어중문학과 전공과목인 ‘한문과 고사성어’도 가르쳤다. 철저히 불교식 교육 방법을 고집했다. 우선 공부시작 전 죽비로 시작을 알리며, 5분 동안 학생들의‘마음챙김’시간을 가졌다. 강의 커리큘럼도〈초발심자경문〉,〈치문〉,〈부모은중경〉등의 경전 가운데 좋은 글을 가려 뽑아서 학생들에게 가리켰다. 마음공부와 겸한 스님의 독특한 수업 방식 때문인지 강의 요청도 잇달았다.

제주대 철학과에서도‘불교철학·인도철학’ 관련 강의를 제안해 10년 동안 꾸준히 강의했다. 제주대 학생들 사이에선 스님의 명성을 모르는 학생들이 없을 정도로 스님의 강의 그 자체가 바로 전법이요 포교활동이 된 셈이다.

이런 바쁜 틈틈이 짬을 내 저술 활동도 했다. 지난 2003년부터 1년 여 동안 제주불교신문에 연재한 ‘금강경 강의’를 바탕으로 제주대 중문과 안재철 교수와 함께 문법풀이를 수록한〈금강경〉을 펴내기도 했다. 이어 2007년 2월에는 중국선종 사상 최고의 저술로 추앙받고 있는〈경덕전등록〉에 수록된 게송의 시가형식과 선사상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이외에도 스님은 또한 탁월한 행정 개혁가였다. 태고종 제주교구 종무원장을 지난 1998년부터 2001년까지 4년 동안 역임하면서 종단 발전의 획기적인 인프라를 구축했다.

당시 타 종교서 우후죽순으로 노인복지사업에 심혈을 기울일 무렵이지만 태고종단의 복지사업은 수암 스님이 종무원장을 맡을 이전까지만 해도 전무했다.“그 당시만 해도 태고종이라면 조계종단의‘아류’란 인식 때문에 복지사업권을 따내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그래서 종단행사인‘방생법회’ 등에 대규모 신도들의 동참을 유도하고, 기관단체장을 초대하면서 태고종단의 대외적 위상을 제고하려고 했습니다. 그 전략이 맞아 떨어졌지요.”

하지만 문제는 종단내부에서 불거졌다. 종단 스님들이“우리가 할 수 있겠냐”는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어서 반대가 심했던 것이다. 결국 수암 스님은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태고종단 스님들을 대상으로 좌담회를 개최하는 한편 제주 도지사와의 간담회도 마련해 복지사업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자 종단 스님들이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수암 스님의 끈질긴 노력 덕택에 결국 태고종단서 2억 원을 들여 토지(현 제주태고원 부지)를 매입해 (사)태고복지재단을 설립했다. 이는 이후 2005년 1월 노인요양복지시설인‘제주태고원’개원에 산파역할을 하게 된다. 이어 2007년에는 미타요양원이, 2010년에는 제주도노인복지관 위탁운영 등 태고종단 복지사업의 기틀을 마련했고, 이는 타지방 태고종 복지사업의 모델이 됐다.

제주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불교철학을 강의했던 수암 스님. 젊은 학생들에게 스님의 강의는 바로 전법이고, 포교였다.

“100세 시대를 맞은 우리나라에서 복지사업은 불교가 앞장서서 펼쳐야 할 분야로 생각해 강력하게 밀어 부쳤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자비심입니다. 늙고 병든 노인들과 아픈 중생들을 위해 그들이 편히 쉴 수 있는 병원과 쉼터를 마련하는 것은 우리 불교가 반드시 해야할 시대적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암 스님은 복지 뿐 아니라 학승답게 재가불자의 교육에도 힘썼다. 타 지방에 불교대학이 점차 우후죽순 생겨날 무렵 제주도에도 불교대학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느꼈다.

수암 스님은 불교교양대학을 통해 ‘참 불자’를 양성하는 것이 한국불교를 발전시키는 지름길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스님은 지금 당장이 아닌 먼 미래를 항상 바라보며 불교대학 건립에 진력했다.

수암 스님의 원력에 이어 지난 1999년 9월 개교한 도내 최초인 제주불교대학은 1기부터 2017년 7월 배출한 41기까지 졸업생 수만도 2천여 명을 넘을 정도로 여기서 배출된 인재들은 제주불교계 뿐만 아니라 제주사회에 널리 퍼져 포교 역량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또한 졸업생들이 주축이 돼 그 당시 창립한 봉사단체인‘태고보현봉사단’, 신행단체인‘태고법륜불자회’, 합창단인‘태고만다라합창단’그리고 제주불교대학 총동창회와 산하 제주불교대학산악회 등은 태고종 제주교구를 떠받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며 포교 일선에서 신행활동에 여념이 없다.

불교대학은 2000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90명 정원으로 한정했지만, 수 개월 동안 기다려야 입학 가능할 정도로 인기가 치솟았죠. 졸업생들이 신행단체로 연계되면서 제주교구의 뿌리는 더욱 튼실해졌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불교대학의 눈부신 성장은 재가불자 이외에도 종단 스님들에게도 퍼졌다. 불교대학 강사로 나섰던 스님들부터 팔을 걷어 부치고 공부에 관심을 가졌다. 순식간에 면학분위기가 종단 내부에 조성이 된 것이다. 종단 스님들은 동국대·동방대 등 종립학교에 입학하는 등 학구열기가 높아졌다. 재가불자와 더불어 교육열기가 동반상승 효과를 일으키는 도화선이 됐다.

이런 공로로 스님은 점차 태고종단 중앙서도 명실상부한 학승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동안 스님이 공부에 전념한 귀결점이자 회향은 태고종단의 인재양성이었다. 수암 스님은 지난 2002년 태고종 중앙교육원장과 2004년 태고종립 동방불교대학 부학장 소임을 맡으면서 10년 동안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고된 일정 속에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강의비를 모아 동방불교대학 후학들의 장학금으로 쾌척하기도 했다. 

“교육이 없으면 우리 태고종의 미래도 없습니다. 1988년 금붕사서 백양사와 선암사 강주를 역임한 서병제 강백을 초청,‘제주교육원’을 설립해 3~4년 동안 도내 스님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했습니다. 당시 공부 했던 스님들이 저를 비롯해 수열, 진주, 수철 스님 등 제주불교계에 향학열을 지피는 기둥이 됐으며, 태고종 제주교구가 타 지방보다 모범적 신행활동을 많이 펼치며 교세를 확장한 것도 바로 교육에서 시작됐다고 봅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제주교육원’은 지난 2014년 1월‘태고제주강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올바른 승가사상을 구현하고 불교의 고유전통에 입각한 승가전문강원이자 도내 유일의 강원이다. 수암 스님의 법맥을 이어받은 태고종 제주교구 종무원장 탄해 스님도 강원을 30여 년 만에 재개원한 것은 제주교구만이라도 제주불교를 책임질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배움에 있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해 보인 수암 스님은 그동안 석사학위 2개, 박사학위 1개를 취득했지만, 2014년 1월 다시 중앙승가대학 대학원‘불전 한어의 복음절사와 문법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박사 학위를 또 하나 취득했다. 이어 수암 스님은 제주대 중문과 안재철 교수와 함께 무문 혜개 선사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번역한‘무문관’도 펴냈다.

수암 스님은 마지막으로“역경은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다른 언어로 바뀌는 것으로 이 번역과정을 통해 새로운 글자가 사용됐고 문법형식이나 수사법 등이 침투돼 언어학적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중국 언어가 사장되는 것이 안타까워 해석 연구한 것이 논문 주제입니다. 중국 언어의 역사를 완성하고 불교라는 종교의 문화적 전이과정을 파악한 것이지요.”라고 최근 취득한 박사학위 논문에 대해 설명했다.

노송 주위에는 그 향기며 자태를 그대로 빼닮은 또 다른 노송들이 즐비하듯 수암 스님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앞으로도 계속 마르지 않고 불자들에게 귀감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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