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함께 기뻐해야 마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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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함께 기뻐해야 마땅”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8.0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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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 스님은 우리가 나의 일이 아닌데도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대립하는 존재로 보지 않고 뜻을 같이하고 행을 같이하며 원을 같이하는 사이로 보며 더 나아가 근원적으로는 같은 생명의 나눔이라는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스님은 우리가 반드시 함께 기뻐해야 마땅하다고 하는 것이다. <편집자 주>

 

다른 사람이 짓는 공덕을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을 자기와 대립하는 존재로 안다면 다른 사람이 착한 일을 했더라도 자기가 기뻐할 이유는 없다. 도리어 다른 사람이 착한 사람이 되어 덕성이 높아질 때 부족한 자신은 상대적 왜소감에 빠지게 되고, 다만 다른 사람이 하는 행위가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 그 행위를 기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짓는 공덕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 입각처가 다른 데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자기와 이해를 함께하고, 기쁨을 함께하고 성장을 함께하는 동일 생명이라는 깊은 신앙에서 비로소 다른 사람의 공덕을 함께 기뻐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대립하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이 설사 착한 일을 하고 잘 되었을 때, 자기와 대립하는 존재가 자기보다 우위에 있게 되는 것이므로 거기서는 불가불 불안과 시기심이 싹트는 것이 일반적이다.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사람을 대립하는 존재로 보지 아니하고 적어도 뜻을 같이하고 행을 같이하며 원을 같이하는 사이이며, 보다 근원적으로는 같은 생명의 나눔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할 것이다. 

원래 일체 중생은 수행을 위한 과제를 안고 이 세간에 태어난 것이므로 사람들이 착한 공덕을 지을 때 그러한 수행의 성과를 자타가 함께 거둔다는 점에 착안해야 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함께 기뻐해야 마땅하다. 또 덕스러운 행이 많아지고 덕 있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환경과 국토가 밝아지고 맑아지므로 또한 기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나아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수행을 성취해 보리도를 성숙시킨다는 사실을 온 우주와 중생들을 위해 함께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보현행원의 함께 기뻐함은 그런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동일생명관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착한 행을 하면 그것이 바로 자기의 기쁨이며 다른 사람이 깨달음을 성취하면 그것이 곧 자신의 기쁨이다. 타인을 다른 사람으로 보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행을 타인의 행으로 보지 않는다. 이러한 큰 생명관에서 보살의 기쁨도 있으며 보살의 슬픔도 있으며, 보살의 자비도 있으며, 보살의 원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살의 눈으로 성인과 범부를 보지만 차별하지 않는다. 친하고 먼 사이가 있지만 그 사이에 거리가 없다. 어리석거나 지혜로운 사람이 있지만 그 사이가 평등하다. 내지 일체 중생의 사는 형태와 생활하는 양상과 행하는 차별에 상관하지 않고 그 모두의 선악 고락을 자기 것으로 안다. 그 가운데 티끌만한 공덕을 짓는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기쁨으로 삼고 함께 기뻐한다. 그러하기에 부처님과 보살들과 그 밖에 많은 성자들이 닦으시는 공덕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 생명이 영원하듯이 그 영원이 다할 때까지 일체 성현과 일체 중생이 짓는 공덕을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경에는 부처님께서 처음 발심하실 때부터 닦으시는 모든 공덕을 기뻐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 사이에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않으시고 무량겁동안 닦으시는 난행고행을 모두 함께 기뻐한다. 가지가지 바라밀문을 닦으며, 가지가지 보살지지(菩薩智地)를 이루어 가며, 위없는 대각을 성취하며 마침내 열반에 드신 뒤에 사리를 분포하실 때까지의 모든 선근을 기뻐한다. 

시방세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들이 닦으신 그와 같은 공덕을 다 기뻐하며, 시방세계 천상이나 인간이나 지옥 아귀 축생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중생들이 짓는 공덕 가운데 설사 한 터럭만한 것이라도 함께 기뻐하며, 또한 시방 삼세 일체 성문들과 그 밖에 모든 성자와 일체 중생을 나누지 않고 그 사이에 착한 사람, 악한 사람 등 세간적 평가에 걸리지 않고 오직 그 사이에 싹트는 거룩한 빛을 설사 터럭끝만한 것이라도 함께 기뻐하는 큰 마음을 배워야 하며, 이 큰 마음의 뿌리 한 생명의 마음에 착안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큰 생명이 본래의 우리 생명이며 우리의 진면목일진대 어찌 이 세상에 대립하고 미워할 자가 있을까? 모두와 함께 마음을 주고 손을 잡고 기뻐하고 서로 돕는 생활이 바로 바른 믿음의 생활이며 깨달음의 행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을 돌이켜보아 우리의 일상생활과 세상 형태를 바로 잡아갈 표적으로 삼아야 하겠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짓는 공덕을 함께 기뻐하는 법문에 이르러서 또 한 가지 깊이 반성할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일체 중생에게 감사하고 일체 중생과 화목하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새로이 감사한 생각이 더해지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과 모든 사람들에 대한 감사다. 저분들이 나를 둘러싸고 나와 환경을 함께 함으로써 나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원래 하나의 생명이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이분들만큼은 내 가까이에 와서 나를 대하고 나와 접촉하며 나와 함께 일을 한다. 이분들이 진정 고마운 것이다. 따뜻하게 대해 주고 자비스러워서 감사하고, 꾸짖고 때려서 나를 경책해 주어서 감사하고, 나로 하여금 슬픔과 괴로움을 다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이기는 힘을 기르게 하여 감사하고 나의 생애를 통해 수행의 성과 있는 생애를 구성해 주어서 감사하다. 

진정 부처님의 은혜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가족과 형제와 이들 모든 사람들을 통해 나에게 흘러오는 것이다. 나를 기쁘게 하고 내 생명의 진실을 알게 하며 나를 진리 위에 키워 주고 단련해 주는 사람들이 바로 이분들이다. 나를 감싸주어서 고맙고, 매질하고 욕하고 억압을 주어서 고마운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진정 감사할 줄 안다는 것이 나의 진실한 생명을 사는 것이며, 남이 짓는 공덕을 나의 공덕으로 알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보살의 생명관이 이러하므로 이 천지 누구와도 대립할 사람이 없다. 아무리 밉게 대해 오고 아무리 쓰라림을 안겨 주더라도 그를 미워할 수 없고 그와 대립할 수 없다. 알고 보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저들이 나에게 한없는 은혜를 주는 것이며, 앞으로도 주는 것이다. 동시에 원래 한 몸이기 때문에 나의 성숙을 진정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이웃과 대립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을 공경하고 서로 화목해야 한다. 만약 대립하고 화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보살의 은혜와 대립하고 등을 지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를 붙여서라도 형제나 이웃과 결코 불화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따라서 복을 받고 소망을 이루려거든 먼저 부모님이나 부부간이나 형제나 이웃과 화목해야 하고 일체 중생에 감사할 것을 알아야 한다. 부모님이나 부부나 형제나 이웃과 불목하고는 아무리 독경 염불하더라도 공덕을 입을 수 없다. 은혜의 물줄기와 등졌기 때문이다. 

원래 부처님은 일체 중생과 함께하시며 일체 생명 위에 함께하신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공양하고 기원하자면 모름지기 먼저 일체 이웃과 화합하고 일체 이웃에 감사해야 한다. 일체 이웃과 불화하고서는 부처님께 공양이 성취될 수 없다. 또 일체와 둘이 아닌 진정한 화합에 도달할 때 거기서는 결코 재앙이 있을 수 없다. 천지 만물에 감사해 둘이 아닌데 누가 그를 해롭게 할 것이며, 일체 중생과 화합해 둘이 아닌데 어찌 그를 해칠 것인가? 모두가 나의 편이 되고 나의 성공 나의 공덕을 찬양하고 기뻐하며 서로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는 일체와 더불어 둘이 아닌 이 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법문으로써 함께 기뻐하는 도리를 배워야 할 것이며, 일체에 감사하고 화목하는 도리를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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