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우주의 모든 실존의 대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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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우주의 모든 실존의 대명사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8.09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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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스님은 불성광명(佛性光明)의 의미를 이야기하면서 참된 부처님의 성품과 닮으려면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스님은 우리가 부처님 명호를 지극 정성 부르면 부처님의 성품이 모여져서 우리의 모습조차도 부처님을 닮아 빛이 난다고 하신다. 이는 곧 염불수행을 통해 부처님의 성품과 닮아갈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편집자 주>

 

불성광명(佛性光明)!

불성(佛性)은 무엇인가? 불성은 광명뿐입니다. 그러나 불성광명(佛性光明)은 사바세계에서  보는 보통 유한적(有限的)인 그런 광명이 아니라 영원적인 진리를 갖춘 광명입니다. 

광명을 부정하는 마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둠입니다. 또한 물질이란 것은 일차 광명을 부정하는 데서 물질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중에 불교를 깊이 연구해 보시면 재미도 있고, 또 그야말로 과학을 보다 더 이끌 수 있는 지혜가 나오겠습니다만 우주가 텅 빈 태초에 우주가 이루어질 때 어떻게 해서 원자(原子)가 생기고 물질이 생겼을까? 불교에서는 우주의 모든 것은 중생의 업 따라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우주가 텅 비어서 허무가 되어버리지만 다만 빈 것은 아닙니다. 광명으로 꽉 차 있고 다만 형체만 비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냥 이런 몸이 아닌 광명체인 중생들이 생각하면 생각하는 힘, 곧 업력이 모이고 모여서 원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중생들은 그때는 형상이 없이 다만 광명을 몸으로 하는 중생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런 중생도 아직 성불을 못했기 때문에 분별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냥 즉시에 싫어하는 마음의 에너지, 업력 따라서 바로 전자가 이루어집니다. 또는 내키는 마음이 있으면 내키는 마음 즉시에 또 거기에서 자기가 이루어집니다. 이런 전자와 자기가 이렇게 모이고 쌓여서 물질이 되고 우주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원은 역시 불심(佛心)입니다. 불심을 우리가 분별시비한 데서 그때그때 물질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물질은 결국 광명을 일차 부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물질에 대하여 차근차근 과소평가하게 되고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닦아보면 알지만 닦아본 분들은 자기 몸을 굉장히 원수로 여깁니다. 여러분도 닦아보십시오. 숨이 막히는 것도 얼마나 원수입니까. 한 고비를 넘어서 몸에 부담이 없으면 그때는 모르겠습니다만 부담이 없을 때까지 그동안까지는 굉장히 몸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원수로 알아지는 것입니다. 조금 잘 먹으면 배부르고 조금 덜 먹으면 배고프고 어디가 조금 언치면 우리 색신을 구성한 원소가 부자유하니까 아프고 말입니다. 

하여튼 우리는 모두가 다 일체가 다 마음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러한 마음을 생명으로 곧, 부처님으로 생각하고 구하며 부처님의 이름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불성(佛性)은 천지우주의 밑바닥이고 우주가 다 불성이기 때문에 몇 마디 말로는 표현을 다 못합니다. 따라서 부처님이나 도인들이 말씀하신 부처님의 대명사인 이름 따라서 겨우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미타불’하면 우리가 뜻은 별로 모를망정 그 말은 벌써 ‘우주의 모든 실존의 대명사구나.’ 이렇게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이 활용하는 하나의 기운, 이것이 관세음보살입니다. 

불경에서 보면 관음삼십삼신(觀音三十三身)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관음의 몸이 서른 세 가지로 화신한다는 말입니다. 부처의 몸, 또는 사람 몸, 국토의 몸 또는 귀신 몸 등 이와 같이 화신이 됩니다. 따라서 관음보살이 무엇인가 하면 부처님의 체가 부처님이 그때그때 만유로 형성하는 그것이 관음보살입니다. 또한 동시에 만유를 다시 부처한테로 이끌어 가는 그것이 관음보살입니다. 

그런데서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내 근본이요 우주의 근본인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부처님을 우리는 다 알 수가 없는 것이니까 다만 그저 끝도 없는 우주에 펼친 광명, 영원적인 진리를 갖춘 광명이 부처구나, 부처님은 우주의 모든 실존의 대명사구나 이렇게 느끼면서 부처님을 생명으로 구하고 부처님 이름을 외우며 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 사소한 것에 얽매이면 공부가 안 됩니다. 참선을 제 아무리 많이 했다 하더라도 마음이 옹졸하면 공부는 못 트이는 것입니다. 마음을 확 열어야 합니다. 

어느 문제를 의심이나 한다든가, 주문만 해서 공부하면 된다고 하면 흔히 사람이 고집만 강해지기도 합니다. 먼저 마음을 열어놓고 해야 합니다. 물론 공부하면 열려지겠지만 잘못 나가면 공부한다고 해봤자 도리어 마음이 더 옹졸해집니다. 

따라서 우선 마음 열어서 비록 내가 미처 증(證)하지 못했다 해도 내 마음은 천지우주를 다 감싸있다고 모두를 다 자기 마음에다 딱 집어넣어야 합니다. 어제 말씀마따나 양자강 물을 한 번에 들이마시는 그런 기운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천지우주의 전부로 보는 지위에서 전부를 내가 다 감싸버리는 그런 기백으로 해서 공부를 해야 만이 차근차근 마음지평이 열려 갑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시 그러한 광대무변한 광명을 상상하면서 부처님 이름을 외우고 염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이름은 그냥 우리 중생 이름과는 다릅니다. 부처님 이름은 명호부사의라, 이름 자체에 부사의한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몸에 향을 지니면 우리 몸에서는 그냥 향냄새가 풍깁니다. 우리 몸에다 나쁜 냄새를 지니면 또 역시 나쁜 냄새가 풍깁니다. 그와 똑같이 가장 높은 이름이고 일체 공덕이 갖추어 있는 그러한 공덕 이름이 부처님 이름이기 때문에 부처님 이름을 자꾸만 외워 쌓으면 그대는 향광장엄이라, 우리 몸에 향기로운 영원자의 빛이 감싼다는 말입니다.

관음보살을 하루에 몇만 번 해보십시오. 그 사람 얼굴은 이상하게 빛나갑니다. 원래 우리가 부처인지라 또 이름 자체에 영원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놔서, 부르면 부를수록 결국은 우리 몸이나 우리 마음은 향기롭고 빛나갑니다. 광명은 차근차근 증장되어 갑니다. 

원래 불심은 광명뿐인 것인데, 우리 중생심은 일차 어두워졌다 하더라도, 부처님을 부르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광명의 비중이 더 높아져서 우리 마음이 광명쪽으로, 불성광명으로, 불심으로 가까워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광명만으로 충만하면 그때는 성불이 되겠지요. 광명만으로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처님을 한시도 안 놓쳐야 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이름은 지극청정보주명호(至極淸淨寶珠名號)라, 지극스럽고 또는 청정하고 보주라, 보배같은 그런 광명이 빛나는 이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미타불이나 그런 부처님은 무량광불이라 합니다. 

이러한 무량한 부처님의 광명을 염두에 두고 찰나도 잊지 말고서 가는 것, 이것이 참선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일상삼매라, 일상으로 보는 그것을 안 끊어지게시리 사뭇 이어 간다는 말입니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 이것이 참선입니다. 

이렇게 해서, 꼭 우리 이번 용맹정진 동안에 부처님 쪽으로 가까이 가셔서 한사코 부처님을 견불성불이라, 반드시 이러한 10식인 불심을 바라고서 성불하시길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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