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토함산 석불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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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토함산 석불사 (5)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08.17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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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46)

석굴암에 대한 학자들의 찬미와 연구는 요즘보다 과거에 더 많이 이뤄졌다. 그러한 내용을 정리하여 석굴암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킨 것이 유홍준 교수가 쓴 『나의문화유산답사기』이다. 1993년 답사기 1권이 나온 뒤 학생과 일반인들 사이에서 답사 열풍이 일어났다. 방학이나 주말이면 유적지에는 답사기를 들고 서문에 쓰인 조선시대 문인의 말을 인용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말을 되새겨 찾아온 답사객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던 곳도 사람들이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제주도에 올레길이 조성되어 올레객들이 찾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듬해 출간된 답사기 2권에 석굴암이 석불사란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그는 책에서 창건설화와 일제의 해체수리에서부터 석굴암의 신비에 도전한 사람들과 1963년 보수공사와 보존 문제 등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그만이 가진 걸쭉한 입담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홀려 그곳으로 가게 만들었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가 북한은 물론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까지 소개하며 25년 간 10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그 중 7권은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이란 소제목이 달린 제주도편이다. 해방 이후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 하는데 그렇게 된 데는 출간 시기와 주제가 절묘하게 잘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80년대 말 5공화국 청문회 등으로 이전에 비해 어느 정도 민주화가 진전된 분위기와 경제적인 안정이 학생들을 구호 대신 학교밖으로 이끌었고, 새로운 것에 대한 그들의 갈증을 우리 문화라는 주제로 풀어준 것이다. 유홍준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이 「조선시대 화론 연구」이니 전공을 굳이 말하자면 회화사라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전공이 아닌 분야에서는 가끔 작은 오류가 있을 때도 있다. 그것은 그가 국민들에게 우리 문화를 알리고 자부심을 갖게 해 준 것에 비하면 말그대로 작은 오류에 불과하다. 신이 아닌 이상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잘못이 있으면 수정하면 되고, 책이 다시 인쇄될 때 사정을 얘기하고 수정이 이루어졌다. 그런 오류가 있으면 서면으로 지적해 주면 된다. 그런데 가끔 그런 오류를 엄청난 발견이나 한 듯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유 교수의 유명세를 빌어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2권에는 광화문 철거를 반대했던 조선인보다도 조선의 미술을 더 사랑했다는 일본인 학자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와 우리나라 미술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유섭(1905~1944) 선생이 석굴암과 석굴암 조각에 대해 찬미하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다. 

야나기 무네요시, 「석불사의 조각에 관하여」, 『예술』, 1919년 6월.   
 
나는 오랫동안 조선의 예술에 대하여 두터운 흠모의 정을 품고 있다. ...... 특히 이 석불사의 조각은 내 여행 중 나를 자극한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이었다. 나는 이 세계의 걸작이 아직도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이것을 널리 소개하는 최초의 한 사람이 되었다. ...... 나는 이 소개를 객관적인  것으로 하기 위해 지극히 멋없는 글이 된 것을 마음 괴롭게 생각한다. ...... 그러나 다소는 나의 사랑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며, 내가 맛본 이해의 어느 부분은 반드시 정당하다는 것을 믿는다.

누가 능히 이 조각에 나타난 그 뜻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이 불상의 아름다움이 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아무런 착잡한 수법도 보지 못한다. ...... 그는 아무런 과장도 복잡한 것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실로 아무것도 없는 지순의 그 속에서 작자는 불타로서 지고의 위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모든 의미는 그  단정한 용모에 모여있다. 그는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입을 다물고 눈은 쉬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는 어둡고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석굴 안에 앉아서 깊은 좌선에 몰두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말하는 침묵의 순간이다. ...... 모든 것을 포함한 무의 경지이다. 어떠한 참된 것도 어떠한 아름다움도 이 순간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 ...... 여기에선 종교도 예술도 하나다.

이 글을 읽으면 100년 전 야나기 무네요시가 석굴암을 보고 느꼈을 감동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그의 조선문화에 대한 사랑이 식민지와 그 문화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되었다는 비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누구보다도 석굴암과 우리 미술을 사랑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야나기보다 조금 뒷 시기에 태어났지만 같은 시기를 살며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의 눈으로 석굴암을 평가한 이가 바로 우현 고유섭 선생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석굴암을 찬미하였다.  
    
고유섭, 「우리의 미술과 공예」, 1930년대.

거대한 연화좌대도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9척이나 되는 불상, 항마촉지인을 한채 온화하고  엄숙한 봉황의 눈을 반개하여 동해 창파를 굽어살피며 듬직이 앉아 계신 위용! 결가부좌한 발모습도 평안하고 두루 원만하거니와, 무릎도 섬세한 듯 둥글고, 무릎까지 뻗어내린 긴 손도 살찐 듯 부드러워 온화하시며, 양어깨 양팔도  풍만하고 원융하시고, 가슴도 장엄하거니와 등줄기도 곧고 엄숙하고, 귓밥도 길게 늘어뜨리고 입술도 두툼하게 내리셨거니와, 콧날도 우뚝하고, 눈동자도 빼어나고 머리도 원만하시다. 피도 없고, 물도 없고, 가슴도 없고, 정도 없는 화강 거석에서 맥박이 충일하고, 신성이 횡일하고, 호흡이 가지런하고, 온화함과 엄숙함이 구비된 위대한 이 상이 드러날 때 환희는 조각공의 손 끝에 있지 아니하고 신라 천지에 휩싸였을 것이요, 우주 속에 메아리 쳐 퍼졌을 것이다.

고유섭 선생은 석굴암 조각을 외형과 내면의 미를 함께 융합한 최상의 종교조각으로 보았다. 100년 전 두 사람이 이렇게 석굴암을 찬미한 이후 유치환, 서정주, 박종화 같은 문인들 외에 석굴암을 찬미한 글은 찾아 보기가 힘들다. 아마 석굴암이 너무 완전하다보니 감히 누가 언급하기가 두려운 것은 아니었을까? 
최근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여행지’,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죽기 전에 꼭 먹어봐야 할 음식’ 등 꼭 해봐야 할 것을 ‘죽기 전’이란 단어를 써서 강조하는 게 유행이다. 죽는다는 부정적인 단어를 바꾸어 ‘살아있을 때 꼭 봐야 할 국내 답사지’로 석굴암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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