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잘사는 게 불교…1996년 청교련 창립 산파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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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잘사는 게 불교…1996년 청교련 창립 산파 역할
  • 이병철 기자
  • 승인 2017.08.30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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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의 주춧돌, 당신을 모십니다 <7> - 김영보 前 제주도청소년교화연합회 회장 -

김영보 전 제주도청소년교화연합회 회장은 1967년 부처님과 인연을 맺고, 한때 출가의 마음까지 발심했다. 그 후 제주불교법우회장, 관음사 사무장 등을 역임했고, 1996년 제주도청소년교화연합회 출범에 밀알이 되면서 청소년 포교에 20여년을 매진하게 된다. 김 전 회장의 불자의 삶을 들여다봤다. <편집자 주>

 

폐결핵 앓은 후 관음사서 요양하며 ‘발심’
1980년 관음사사무장 역임 때 ‘10·27법난’

 

1996년 제주불교 짊어질 청소년 포교 매진
아시아 축제 개최, 유해환경 감시단 조직

 

김영보 前 제주청소년교화연합회 회장은 … 1960년 고등학교 시절 관음사서 요양하며 불교에 귀의했고, 1980년 관음사 사무장 소임 당시 ‘10·27’ 법난을 경험 했다. 1983년에는 제주불교법우회 회장을 통해 제주불교 신행단체 발전에 노력하다가 청소년 단체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 1996년 제주청교련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해 제주특별자치도내 청소년 단체의 활성화를 꾀하는데 기여했다. 김 前 회장은 청교련제주지부 설립부터 현재까지 20여년 동안 도내 유관기관 및 사업장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청소년들의 교과외 활동이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그 중요성에 대해 인식을 같이 할 수 있도록 홍보했다. 또한 2010~2014년까지 4년 동안 제주청교련 회장직을 수행하며 다양한 청소년참여 프로그램을 개발 보급하는데 노력했다. 그리고 2015년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전국 청소년지도자 대회에서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했다.

제주불교계는 60만 제주도민 가운데 30만이 불자이고, 경남과 부산에 이어 전국서 세 번째로 불심이 높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제주불교의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 포교는 정체가 아닌 침체에 빠진 현실이고 보면 이는 공허한 메아리로만 들릴 뿐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1996년부터 청소년 포교에 원력을 펼치고 있는 김영보 前 (사)제주특별자치도청소년교화연합회 회장(70)의 신행생활은 귀감이 되고 있다. 김 회장의 삶 자체가 불교고, 수행이기 때문이다. 김 前 회장은‘청소년이 잘 사는 게 불교’라는 일념으로 청소년 포교 원력을 세워 일선에서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이런 원력은 불교 집안인 내력에서 비롯됐다. 불심이 돈독한 집안서 태어난 김 前 회장이 불교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인 지난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폐결핵을 앓게 된 김 前 회장은 3년 동안 요양차 집 인근에 있던 조계종 제 23교구 본사인 관음사로 들어간다. 산사생활을 하면서 그는 매일 예불을 올리고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면서‘아! 불교가 이런 것이구나’하고 불교의 참 맛에 빠져 들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김 前 회장은‘출가해서 스님이 되어도 괜찮겠다’는 발심을 하게 된다.

이후 폐결핵이 호전돼 군 복무를 마친 뒤 출가를 하려했으나 집안 사정으로 꿈을 접었다. 출가는 무산됐지만, 이 시기가 김 前 회장에겐 불교적 삶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1976년 도내 최초의 신행단체인 제주불교법우회에 참여한 것을 비롯해 1980년 관음사 종무소 사무장 소임을 맡으며 불교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도 바로 이런 인연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로 이 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뜻하지 않게 김 前 회장은 ‘10·27 법난’에 휘말리며 당시 군경에 의해 고문 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관음사 중앙포교당 건물이 완공되면서 사무장을 맡게 됐습니다. 법난 발생 하루 전인 26일에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종무소로 출근했는데 총을 찬 두 명의 군인이 저를 종무소로 끌고 간 후 현금출납장부를 뒤지더니 군기무대로 연행해 갔습니다. 그 곳에는 이미 당시 관음사 주지인 지선 스님(현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관음사 총무국장 연종 스님, 관음사 신도회장 故 고원규 씨도 연행돼 있었습니다.”

고초를 겪고난 이후 김 前 회장의 본격적인 신행 활동은 1983년 법우회 회장 소임을 맡으면서 부터다. 관음사 중앙포교당(현 제주은행 본점 맞은편 중앙주차장)서 매주 예불, 천수경 독송, 108참회 등의 참회법회를 열었다.

“이것이 불자의 도리라고 생각하며 의무감처럼 열심히 했습니다. 참회 법회를 열면서 내 자신을 내려놓는 계기가 됐습니다. 매일 매일의 기도와 신행은 배고프면 밥을 먹는 것처럼 저의 삶의 일부가 됐습니다. 남을 위해 봉사해야겠다는 발심도 바로 이때 많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이후 1990년대 초 관음사 자비회 회원으로 활동했던 김 前 회장은 그 무렵 관음사 측이‘중앙포교당을 없애겠다’고 선포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자비 회원들에겐 제주불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포교당을 더 짓지는 못할망정 없앤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됐다. 포교당에 주차장 시설이 들어서면서 연화유치원을 비롯해 법우회 등의 신행단체, 대불련, 룸비니 등 청소년 단체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이런 어려움이 지속되던 지난 1996년 김 前 회장은‘불자 청소년들이 봉사인증을 받을 수 있는 단체는 청교련 밖에 없다’는 불교계 뉴스를 접하고는 머리를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는‘우리가 바로 해야 할 일이 이거였구나’라고 깨닫게 됐다. 김 前 회장의 청소년 포교 원력이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김 前 회장은 바로 청소년교화연합회(이하 청교련) 중앙회에 전화를 걸어 제주지역에 청교련을 창립하겠다고 뜻을 내비쳤다.

청교련 중앙회는 그동안 제주지부를 설립하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나서겠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뜻하지 않던 희소식에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전화를 끊자마자 김 前 회장은 곧바로 김수진 관음사 前 신도회장에게 곧바로 달려갔다.“그때까지 제주도는 청소년 포교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습니다. 아니 인식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뜻 누가 나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불교를 짊어질 청소년 포교가 진정한 인재 불사라고 계속 설득했지요.”

끈질긴 김 前 회장의 구애에 관음사 자비회원들을 모두 이사진으로 등록하고, 고봉식 당시 제주관광대 총장을 초대 지부장에, 조명철 당시 제주시교육장 등을 이사 등으로 운영진을 꾸렸다. 그리고 그해 제주도내 중·고생 2,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청소년들에게 도덕성을 키워주는 윤리회복실천대회 및 캠페인을 남녕고등학교 체육관서 열고 제주도청까지 캠페인을 벌이며 제주청교련의 첫 출범을 알렸다. 

이듬해인 1997년에는 아시아청소년축제 및 국제캠프대회를 김녕해수욕장 일원서 개최한 가운데 외국인 80명과 전국에서 50명, 제주도 청소년 220명 등 총 350명이 참석하는 대성황을 이루며 본격적인 청소년 포교에 닻을 올렸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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