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가 나는 수필-망중한(忙中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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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가 나는 수필-망중한(忙中閑)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11.1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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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실(제주시장, 수필가)

분(分)단위로 쪼개어 무엇인가 끊임없이 해야 하는 입장에서 2~3일이란 기간은 엄청난 시간적 여유임에 틀림이 없다. 그 기간 중에 꼭 챙겨야 할 일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해야 한다는 주위의 말도 일리가 있기에 망중한(忙中閑)의 시간을 냈다. 
두둥실 구름이 한층 높아졌다. 엊그제 입추라던데 가을 하늘이 공활하다는 말이 맞는 듯 소백산 일대가 운무와 더불어 절경이 펼쳐져 아름답기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충청북도 담양군 소백산 연화봉 아래 구중궁궐처럼 깊숙하게 자리 잡은 구인사는 천태종의 본산이다. 1945년 상월 원각 스님이 칡덩굴을 얹어 암자를 지은 것이 구인사의 시작이다. 지금은 웬만한 강기(剛氣)가 아니면 오를 수 없을 만큼의 좁고 가파른 산세를 따라 험준한 협곡 속에 가람배치가 오밀조밀하게 되어 있으며 산세를 훼손하지 않고 언덕과 언덕을 이어가면서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폐 속 깊게 스며드는 소백산맥의 기류와 구인사 호국 부처님의 진리의 파편들을 퍼즐 맞추듯이 내 삶의 인연들과 비추어 보노라니, 어느덧 내 온몸은 땀줄기로 목욕을 한 듯 흠뻑 젖어 있다. 얼마 만에 온몸을 적셔 보는지 모르지만 몸과 영혼이 맑아지는 순간이다. 
“내가 태어나 살아오면서 접한 모든 것.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접할 유무 모든 것 중 내 것이 어디에 있는가. 내 몸뚱이마저 잠시 빌려 쓰고 가는 것을…….”
큰스님께서 내놓은 말씀 조각을 읽어 내려가면서 소백산 구인사 조사전에서 먼 산을 바라보는 내 심사 또한 이제껏 살아온 내 삶의 흔적들이 스님들께 주신 말씀과 무엇이 다르랴하는 사념에 깊이 젖어든다. 이러하듯 세상사가 허허스러운 걸 당장에 내 것인 양 속에서 불이 나기도 하고 앙탈부리듯 살기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지지배배 거리면서 사찰 경내를 돌아보고는 다시금 정도전 선생의 혼 바람이 얽혀 있는 도담상봉을 돌고 드디어 내가 그토록 가고 싶고 보고 싶었던 영주 부석사에 이르렀다. 
내가 보는 무량수전은 첫눈에 미적 단백함을 물씬 느끼게 해준다.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신라시대 이후 수많은 선지자들과 백성들의 숨결을 느껴보려 했다. 저 멀리 운무 속에 담겨 있는 소백산 줄기 속에서 수천만 얼굴들이 스크린에 비추듯 눈앞에 아른거린다. 아파하고 기뻐하며 우주의 섭리를 관통하려 수행하는 스님들의 묵상 속에서 보일 듯 말 듯 다가오는 생명의 소리가 큰 범종 소리 여운을 길게 내듯 아스라이 울림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착각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순간이다. 그러나 깊게 다가오는 담백하면서도 간결한 옛 조상들의 삶을 한눈에 보는 듯한 느낌은 매우 소중하게 나의 의식을 일깨우고 있다. 
참 잘 왔구나. 한 두석 달 바쁜 시간을 쪼개어 아미타경을 사경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품으려 했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에 정좌하신 아미타 부처님을 친견하려는 인연의 시초였구나 싶다. 어떤 일이 일어날라치면 2~3백 개 조짐들이 비춘다고 하는데 아마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가족과 함께 걷고 또 걸으며 땀 흘리고 난 후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을 비우니 잠이 소록소록 다가온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다정다감한 정담이 자장가처럼 나를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고 있다. 
“망중한(忙中閑)”
바쁜 일상에서 자연인 듯 부처인 듯 나만의 연인을 찾아 다시금 소매가 펄럭일 만큼 힘차게 시작할 수 있는 삶. 이게 인생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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