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견해를 가지면 오로지 평화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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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견해를 가지면 오로지 평화가 있을 뿐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11.2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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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대선사‘아잔 차’스님의 가르침(下)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아쟌 차 스님(1918~1992)은 태국, 빠뽕사원의 주지로, 이 법문은 1977년 3월 외국인들과 제자들에게 한 설법이다. 가장 많이 알려진 이 글은 <보디냐나지(誌)>에 실렸으며,‘마음’을 주제로 한 법문으로 불자와 일반인들에게 큰 위안을 주고 있다. 
-편집자주

 

[아잔 차(Ajhan Chah:1918~1991)]아잔 차는 쉽고 명쾌한 법문으로 동,서양 불교도들로 부터 추앙받는 태국의 대선사이다. 1918년 태국 북동부의 라자다니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을 마친 후 출가하여 20세에 비구계를 받았다. 서양의 불교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정신적인 스승으로, 현재 그가 세운 왓빠뽕 사원은 태국 내 250여 지부와 전 세계에 수십여 수행센터 및 자매사원들을 갖고 있다.

 부처님과 깨달은 제자들은 깨닫지 못한 일반 사람들과 같이 사셨습니다. 같이 살았을 뿐 아니라 이들 평범하고 깨닫지 못한 무지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고귀하고, 깨달은,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가르쳤습니다. 그분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수행 방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내가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이것이 오로지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선정 수행이 진전되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이것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출가하여 승단에 들어온 것은 미혹에 빠져 헤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또 비겁해서이거나, 두려움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의 출가는 우리 자신을 길들이고,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이 같은 이해를 확고히 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을 따를 수 있습니다. 법은 더욱 더 명명백백해질 것입니다. 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해합니다. 또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은 법을 이해합니다.
 요즈음은 결실을 맺을 수 없는 법의 찌꺼기만이 규범으로 받아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법은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따라서 법을 찾아 어떤 다른 곳에서 헤맬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지혜를 통해 벗어나십시오. 지성을 통해 벗어나십시오. 좋은 방편을 통해 벗어나십시오. 무지의 어리석음[無明] 속으로 도피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이 평화를 원하거든 지혜로운 평화가 되도록 하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법을 바로 볼 때만이 거기에 바른 길이, 바른 도가 나타납니다. 번뇌는 단지 번뇌일 따름이며 마음은 단지 마음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사물로부터 떨어져 따로 설 때 사물은 진정한 실상 그대로이게 되면서 우리에게는 단순한 객체로 머물게 됩니다. 우리가 바른 길을 걷는 한 결코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잘못을 범하지 않으면 언제나 거기에는 열린 마음과 자유가 있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비구들이여, 내 말을 주의깊게 들어라. 그대들은 어떤 법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체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 법이 아닌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과 증오도 법이며, 즐거움과 괴로움도, 좋아함과 싫어함도 법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이 모든 것들이 법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을 실천할 때 그래서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잡고 있던 것을 놓아 줄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순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생겨나는 모든 조건들, 우리 정신의 모든 조건들, 우리 몸의 모든 조건들은 항상 변화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들 가운데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조건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할 것이며 더 이상 무엇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우리는 올바르게 됩니다. 우리는 올바르지만 문제는 또 있습니다. 문제에 부딪치는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번뇌입니다. 즉 번뇌란 놈이 스스로 골치 아프게 되어 우리를 방해하고 온갖 문제를 야기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번뇌를 번뇌인 줄 모르고 내 마음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충실히 따르면 결코 어떤 문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부처님의 도에 매달리면 어떤 고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도는 현상을 이루는 모든 법을 하나하나 풀어 놓아버릴 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 선정의 최상의 수행법으로서 부처님께서는‘놓는’공부를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것도 지니지 마십시오! 떨쳐 버리십시오! 좋은 일을 보아도 놓아버리십시오. 옳은 일을 보아도 놓아버리십시오. 이‘놓는다’는 말이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놓아버리는   방법 그 자체를 따라 수행을 해 나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을 주의 깊게 살피라고 가르치셨으며 또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잘 살핌으로써 도(道) 공부를 바르게 지어나가라고 하셨습니다. 법은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멀리 떨어진 어떤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몸과 마음 속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선정을 닦는 사람은 힘 있게 정진해야 합니다. 마음이 더욱 커지고 밝아지도록 하십시오. 마음이 자유롭고 독립되도록 하십시오. 선행을 하고 나서 그것을 마음속에 지니지 말고 놓아버리십시오. 나쁜 행위를 삼가고서도 그것을 놓아버리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현재의 이 순간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과거 속으로, 혹은 미래 속으로 여러분 자신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어 하고 또 그들이 원래 갖고 있던 생각과 가장 상충되는 가르침이 바로 이‘놓아라’라든가‘빈 마음으로 일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법의 언어’라 합니다. 이를 세속적인 용어로 받아들이면 혼란에 빠지게 되어, 마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도 좋다는 말로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질 소지도 없지는 않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가까운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 무거운 바위를 끌고 간다고 칩시다. 조금 지나자마자 우리는 그 바위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합니다만 그것을 어떻게 놓아버려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무거운 짐을 계속 짊어지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것을 던져버리라고 말하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내가 이걸 던져 버리면 나에게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잖아!”그걸 던져 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어떤 것이라는 얘기를 들어도, 우리는 여전히 그걸 믿지 않은 채“내가 이걸 던져 버리면, 난 아무 것도 없게 돼”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쳐 허약해져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그 무거운 바위를 끌고 가다가는 마침내 힘에 겨워 떨어뜨리고 맙니다.
  그걸 떨어뜨리자마자 우리는 갑자기 놓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이로운가를 경험하게 됩니다. 곧바로 가볍고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되며 바위를 끌고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를 알게 됩니다. 바위를 놓기 전에는 놓아버린다는 것의 이익을 좀처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우리에게 놓아버리라고 얘기해 주어도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는 맹목적으로 바위를 붙들고 놓지 않다가 마침내 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진 다음에야 할 수 없이 놓고 맙니다.
  그때 그는 홀가분함과 안도감을 스스로 느끼며, 놓아버림으로써 비로소 얻게 되는 이익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거듭 짐을 지게 되겠지만 그 결과가 무엇인지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보다 쉽게 놓아버릴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짐을 지고 다니는 것이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 그리고 놓아버리면 편하고 홀가분해진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알게 된 구체적인 한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아만 즉‘나’라는 자아의식은 바로 그 무거운 바위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바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만을 버릴 것을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만을 결국 놓아버릴 수 있다면,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길들이는 데 있어서는 칭찬이나 비난에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칭찬을 원하고 비난을 원치 않는 것은 세속의 길입니다. 부처님의 길은 칭찬받을 만한 때에는 칭찬을 받아들이고, 또 비난받을 만한 때에는 비난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를 키울 때 항상 야단만 친다면 이것은 대단히 바람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나치게 야단을 칩니다. 현명한 사람은 야단칠 때와 칭찬할 때를 잘 압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알기 위해 지성을 발휘하십시오. 마음을 보살피는 데 좋은 방편을 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마음을 닦는 데 있어 보다 현명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잘 길들여지면, 그 마음 덕분에 우리는 괴로움을 면할 수 있게 됩니다. 괴로움은 바로 여기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괴로움은 언제나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들며,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괴로움은 바로 여기 마음에서 생겨났습니다. 또한 바로 이 마음에서 없어집니다.
 마음이란 이와 같습니다. 어떤 때는 좋은 생각이 나고, 또 어떤 때는 나쁜 생각이 떠오릅니다. 마음은 속임수 투성이입니다. 마음을 믿지 마십시오! 그 대신 마음 자체를 만드는 조건을 똑바로 보십시오. 그 조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그 조건들은 단지 있는 그대로일 뿐입니다. 그것이 선하건 악하건 또는 다른 어떤 것이건, 결국은 그러한 방식으로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조건들을 붙잡고 있지만 않는다면 그것들은 원래 있던 그대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습니다. 만일 붙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것에 물리게 되고 그래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바른 견해[正見]를 가지면 오로지 평화가 있을 뿐입니다. 삼매가 생기게 되고 지혜가 그 뒤를 잇습니다. 여러분이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곳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는 항상 평화가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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