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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두륜산 대흥사 (3)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53)
<명선>‘차를 마시며 선에 들다’는 의미로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써 준 글

 1604년 1월 묘향산에서 서산대사가 입적한 후 대사의 유훈대로 스님의 의발이 대흥사에 전해졌다. 이후 작은 절이었던 대흥사는 13분의 대종사와 13분의 대강사가 배출될 정도로 크게 번창하였다. 이 26분의 스님들 중 일반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분이 바로 13대 대종사인 의순(意恂, 1786-1866)스님이다. 의순 스님이라고 하면 아는 분이 드물지만 그분의 호인 초의(草衣)를 말하면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분의 행적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해도 차(茶)와 해남에 유배 온 정약용이나 당대 최고의 서예가 김정희와 교유했던 일화들을 들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초의 선사는 당대 대학자, 문인들과도 교유하여 불가에서뿐만 아니라 유림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또한 그는 시와 다도뿐만 아니라 원예, 범패, 장 담그기 등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번잡함을 싫어한 스님은 대흥사에서 30~40분쯤 걸리는 산중턱에 일지암이란 암자를 짓고 40여년 간 생활하였다. 그곳에서 제자 수백 명을 기르고 세속의 나이 81세, 법랍 66세에 입적하였다. 
초의 선사의 속세 성은 장(張)씨이며 1786년 전라남도 무안에서 태어났다. 사리탑 탑비에 쓰인 내용에 의하면 스님의 어머니가 품에 큰 별이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스님을 잉태했다고 한다. 6살 때 강가에서 물놀이를 하다 죽을 뻔했는데 마침 근처를 지나던 스님이 구해준 것이 불교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16세 때인 1800년 남평(南平) 운흥사(雲興寺)에서 출가한 후 대흥사에서 구족계와 초의라는 법호를 받았다. 22세 때부터 선지식을 찾아 월출산,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등 명산을 순례하며 공부하여 경율론 삼장뿐만 아니라 유교, 도교 등 제반 학문에도 통달하였다. 특히 24세 때는 강진에서 유배생활하고 있던 정약용을 만나게 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1762년생이니 초의 선사보다 24살 연상이었다.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역사, 언어, 의학, 과학 등 다방면에 걸쳐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당대 최고의 석학과 스승과 제자로서의 만남은 초의 선사에게는 행운이었다. 초의선사는 다산으로부터 주역 등 한학을 배웠고 다산은 초의 선사에게서 차에 대한 자문을 받았다. 스님에게 다산이 어떤 분이었는지는 1813년에 쓴 초의 선사의 시로 알 수 있다. 

자하의 계곡을 생각할 때면 분분했던 꽃과 나무 뚜렷이 떠오른다. 장맛비가 괴롭게 서로를 막으니 밖에 나갈 채비를 갖추고도 스무날을 보냈다. 어른과의 약속을 제 때에 지키지 못하니어디에도 내 진심을 하소연할 곳이 없구나.

 장맛비 때문에 다산초당으로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스승을 향한 죄송한 마음과 뵙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쓴 시다. 1818년 정약용 선생이 유배에서 풀려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가자 초의 선사는 남양주로 가서 선생을 뵙고, 그의 아들인 학연, 학유 형제와도 가깝게 지냈다.
 30살이 되던 1815년에는 동갑내기인 추사 김정희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수어지교를 맺게 된다.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정약용 선생의 아들 정학연의 소개에 의한 것이다. 강진으로 아버지를 찾아 온 정학연이 아버지의 소개로 초의 선사를 알게 되었고, 그의 깊은 학식에 감동하여 한양에 오면 명사들을 소개시켜주겠다고 약속했고, 초의 선사가 한양으로 오자 추사를 소개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초의 선사가 한양 인근에 있는 수락산 학림암에서 해붕선사를 모시고 있을 때 추사가 해붕선사를 찾아왔고 초의 선사와도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맞든 30세에 두 사람은 만났고 동갑내기로 의기가 투합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30대에서 40대까지 김정희는 옹방강과 같은 중국의 유명한 학자들로부터 인정받았다. 특히 금석학과 고증학 같은 신학문의 선두 주자였고 글씨와 그림에 있어서도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다. 그런 시기에 추사는 초의 선사와 만났고, 자신의 기량을 맘껏 발휘하다 절정에 오를만한 55세 때(1840년) 옥사에 연루되어 7년 3개월 간, 햇수로 9년 동안 제주로 유배를 간다. 유배 기간 중에 장과 김치를 담가 보냈던 부인이 죽고, 홀로 쓸쓸히 회갑을 맞았으니 그 외로움과 억울함이 어떠하였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마음들을 한 올 한 올 모아 글로 표현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김정희의 개성적인 글씨 추사체이다. 그런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전혀 다른 면모가 보이는 것이 있다. 그만큼 두 사람의 사랑과 우정이 돈독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은 한 번도 보지 못했네. 산 중에 바쁜 일이 없을 것이 확실한데, 나 같은 세속 사람하고는 어울리지 않을 심산으로 이처럼 내 마음이 간절한데도 외면하는 건가. 
나는 초의를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초의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와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 못하여 이번에 또 한 번 더 차를 재촉하니 
보낼 때 편지도 필요 없고 
오로지 두 해 동안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시게. 또 다시 지체하거나 어긋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네.  

초의선사가 40년간 머물었던 일지암

 이 정도면 빚쟁이가 빚을 독촉하는 것과 거의 다를 바가 없는 엄포다. 이러한 투정에 초의 선사는 차를 보내고 몇 번 제주에 가서 만나기도 하였다. 그런 초의에게 추사는 글로써 고마움을 전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글씨가 간송미술관에 전하는 <명선(茗禪)>이다.‘차를 마시며 선에 들다’는 뜻으로 오른쪽에 잔글씨로 글을 쓰게 된 내용을 적었다. 

초의가 스스로 만든 차를 보내 왔는데 몽정과 노아(중국의 유명한 차)에 덜하지 않다. 이 글씨를 써 보답하는데‘백석신군비’필의로 쓴다.

 대흥사에 가면 초의선사의 암자 일지암과 초의 유물관에 들러 초의선사의 차 사랑과 친구 김정희와의 우정에 대해 생각해보자.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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