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때는 섬기는 법을, 또 어떤 때는 이끄는 법을 배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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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는 섬기는 법을, 또 어떤 때는 이끄는 법을 배워야”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7.12.13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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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선사‘아잔 수메도’스님의 법문(3)

이 글은 저자가 1984년 영국불교협회의 하기수련대회에서 상좌부 불교반의 영미 불자들에게 행한 강연 내용이다. 영국불교잡지 <The Middle Way> 1985년도 11월호에서 옮겨 실었다.
<편집자주>

 

아잔 수메도 스님이 80회 생신을 맞아 선물을 받고 즐거워 하고 있다. 런던 인근에 산림 승원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아잔 수메도 스님은 그동안 서양불교의 지휘자 역할을 해왔다.

 

서양의 불교 신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남들 눈에 띄지 않게끔 몸을 숨기고 지내는 밀실(密室)의 불자(佛子)쯤으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요? 남들이 우리를 경멸하고 어딘가 좀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까봐 불교도란 사실을 감추고 싶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여름 수련대회 때에나 슬쩍 나타났다가 다시 일 년 내내 숨어 지낼 장소를 찾아 스코틀랜드의 고지대 같은 곳이나 찾아드는 식의, 일종의 숨은 생활을 영위하려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시절인연상 그것이 가장 적절하고 다른 방법이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우리 사회를 위해 크게 도움될 생활 방식을 실천하고 있는 한 선각자로서 자신을 돌아볼 줄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즉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사회구조 속에서 자신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떳떳하게 책임을 지는 것은 우리의 수행을 위해서도 매우 유익한 일인 것입니다.“흥, 여기가 불교 나라였다면 난 정말 뭔가를 할 수 있었을 텐데. 현실이 이 모양이니 눈에 띄는 것이라곤 모조리 흠투성이요 불리한 점뿐이란 말야.”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나라를 가망없는 나라로 보고 완전히 기가 꺾여 물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딘가를 이상향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맞았어, 태국은 내가 뭘 좀 해볼 수 있는 나라일 것 같애. 틀림없어!”
실제로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곳의 불리한 여건이나 흠들을 모두 들추어내고 다른 곳은 그런 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상상합니다. 사람들은 논에서 일하는 태국 농부의 행복스러운 모습을 낭만적으로 머릿속에 그려보곤 합니다. 그 농부는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박사 학위가 주는 따위와 같은 부담은 아예 지니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영국인 기질을 부담스러워해야 할 필요도 없고 영국의 추위가 주는 어려움도 없고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 으레 안아야 하는 갖가지 문제점들도 없을 테지요. 
그 농부에게는 이렇듯 온통 밝은 면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마냥 웃음이 넘치고 지혜 또한 충만한, 때 묻지 않은 먼 이방인을 머릿속에 그리며 동경합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사람들은 그곳을 찾아가 직접 살아보게 되면 태국 동북부에 태어난 사람들이 맛보던 온갖 불리한 점들을 맛보게 됩니다. 전에 상상했던 그 행복한 태국인, 얼굴엔 웃음만이 있고 가까이에는 절이 세워져 있고, 골치 아픈 문제라곤 전혀 없는 그 행복한 태국인은 하나의 낭만적 환상이었을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불교가 태국의 모든 문젯거리들을 다 해결해버렸고 그러니까 영국을 위해서도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릅니다. 나로 말하자면 태국에서의 생활을 즐겼고 그 나라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 가 살고 싶습니다.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조금도 거역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곳은 지구상의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살기 좋은 곳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도 역시 불리한 점은 있습니다. 분명히 좋은 점도 있지만 완벽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미국인인 여러분들은 계급구조가 그다지 명확하지 않은 사회에서 자라났습니다. 그것은 미국이 혁명적인 이상주의, 즉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이념이 만들어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미국에도 계급구조가 다소는 있지만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공공연하게 인정되고 있지도 않습니다. 사실은 계급구조를 무시하고 부인하는 것이 국민된 의무이기도 하는 바, 이것은“누구에게나 동등한 권리를!”이라는 만인 평등사상이 그 나라의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상이 한창 성장기의 마음에 끼치는 영향은 매우 깊을 수밖에 없으므로 미국 사람들의 일반적 사고방식“우리는 모두가 똑같다. 그런데 너는 왜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시키려드느냐”는 식이 됩니다.
가령 당신이 어느 기업체의 전무이사로서 자신을 윌리엄 존스라고 소개한다면, 신입사원은“자, 빌, 당신을 위해 여기서 일하게 되어 기쁩니다.”라는 식으로 인사를 차릴 테지요. 그런데 혹시라도 너무 정중하게“존스 씨, 당신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쁩니다.”라고 했다면 당신은 속으로“바보 같으니”하고 혀를 찰 것이 뻔합니다. 전무는 전무로서 손색없이 자기 역량만 발휘하면 그만이지, 전무나 평사원이나 다를 게 무엇이냐는 사고방식인 게지요. 그렇지만 실제로 전무이사란 얼마나 감당하기 벅찬 대단한 자리입니까. 어쨌든 미국의 이런 상황은 여러 가지 이로운 점과 또한 여러 가지 불리한 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인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타인들에 대해 처신해야 할 것인지 자신감을 못 가집니다. 미국인의 인간관계가 주로 친구로 어울려 친밀하게 구는 데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똑같고 평등하다는 생각만이 너무 굳게 다져져서 어떤 구체적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 상황이 요구하는 적절한 몸가짐을 자신 있게 취하지 못하고 맙니다. 특히 남의 아랫사람 노릇에 그러합니다. 사실 남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섬기고 복종하고 돕고 공손하게 굴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특히 미국인인 여러분은 어쩌다 누구를 섬겨야만 하거나 누군가의 밑에서 지내야 할 입장이 되면 마음속으로 심한 증오심을 끓이게 됩니다. 사무실에서 일손을 거드는 급사조차도 커피 한 잔만 끓여달라고 하면 속으로 곧장“흥, 내가 당신 노예인 줄 알아?”라고 투덜댑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어디까지나 급사이지 너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누구를 대하면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자신 있게 확신을 못 갖는 이런 일반적 혼란이 미국인들에겐 때때로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미국인들은 종종 영국인들을 곤경에 빠뜨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급하게 너무 친밀해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단박에 모두를 친구로 만들려 들기 때문입니다. 
영국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과 금방 친구가 되는 그런 성향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미국인의 이런 태도를 무례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튼 미국식으로 사람들이 친밀하게 굴고 사귀기가 쉬워 만나자마자 거의 죽마고우처럼 되는 데에도 분명 좋은 점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계급구조의 사회에서는 인간 상호관계의 모든 면이 분명하게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서는 결국 그 모든 관계가 조만간에 경직되게 마련이며 사람들은 별 수 없이 소심해져서 자신의 특정 위치에서 벗어나려 들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계급구조 사회 내에서는 사람들은 설정된 한계 밖으로 나가거나 남과 너무 친밀해지거나 또 위나 아랫사람으로부터 비판받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도 또한 이로운 점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와 같은 지적을 하는 것은 나 자신이 평등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살아왔고 또 태국 사회와 같은 심한 위계적 사회구조 속에서도 살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원(寺院)제도 역시 매우 계급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양쪽 제도의 장단점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은 숙고해서 잘 살펴 볼 일이지, 함부로 어느 쪽을 편들거나 반대할 일은 못됩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 제치고 한 가지 처리방식에만 고집하지 않게 되면 양쪽 모두 시의적절히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한 가지 고정된 당위론적 견해로 모든 상황을 풀려들지 않고 국면의 변화에 따라서 자신감을 가지고 자유로이 적응해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비판받거나 거부당하기를 싫어합니다. 안 그래요? 그렇지만 때로 온 마음을 기울여 남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라는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역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서 큰 기쁨을 얻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그것이 비천한 노예근성이거나 나약함 또는 열등감을 자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누구나 남을 돕고, 남에게 봉사할 수 있으면 기쁨을 실제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런 일은 품위를 손상시키거나 격을 떨어뜨리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 마음속에“난 너의 노예가 아니다. 어찌 감히 나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수 있는가? 네가 해라! 너도 사지가 멀쩡하지 않느냐!”라는 식으로 거부하는 생각을 품고 있을 땐 그것이 품위와 격을 떨어뜨리는 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일 뿐입니다. 
승려로서 우리는 절 집안에서 윗사람을 어떻게 섬기고 어떻게 대중을 이끌어나가고 또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를 배웁니다. 그것은 정해져 있는 위치는 아닙니다. 각자의 위치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집니다. 때로 여러분들은 남을 주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이것저것 할 일을 지시하는 역할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태국 치서스트에 오는 아나가리까(재가 수행자) 중에는 과거에 중요한 직위에서 일해 본 경력을 지닌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절에 오면 그들도 입산 서열대로 모든‘아나가리까’나 비구들의 맨 끝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그럴 경우 자기보다 어리석고 자격도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을 시봉해야 하는데서 좌절감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라면, 또 하나의 극단은 여러분이 상급자가 됐을 때 경험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그대가 그다지 주도적이지 못하고 수줍은 성격의 사람이라 칩시다. 자신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판인데 남을 지도해야 되는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어느덧 구참 스님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대는 생각합니다.“맙소사, 사람들은 내가 완벽하기를 바라는군. 저들은 어떤 문제든 모두 답해주기를 바라는군. 지도를 해주어야 되는데 어떻게 내가 그럴 수가 있어.”그래서 그 입장에서 벗어나 보려 궁리합니다.“아직 나는 그럴 준비가 안 돼있어. 어디 가서 토굴생활이나 할까, 아니면 태국으로 돌아가 버릴까?”그러나 이런 상황을 곰곰이 잘 들여다보면 이번에는 이것이 바로 당신이 공부해야 할 과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때는 섬기는 법을 우리는 배워야하고, 또 어떤 때는 앞장서 이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양쪽을 다 해낼 수 있도록, 변화에 적응하도록, 시간과 장소에 따라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지 알도록, 그리고 구조 내에서 그 집단의 안녕을 위해 일하는 법을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은 고정된 관념보다는 현명한 고찰을 필요로 합니다. 이와 같이 자유로이 적응하고 현존상황을, 우리 실생활을, 도(道)로 살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공부해나가면 자연히 팔정도 수행으로 발전해나가게 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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