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는 무속과 습합되며 개인의 신앙형태로서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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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는 무속과 습합되며 개인의 신앙형태로서 지속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1.17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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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불교 수용과 역사적 전개① - 전영준 교수 (제주대학교 사학과)

지난 12월16일 탐라성보문화원이 주최가 돼 마련한“한라산 영산재의 무형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전영준 제주대 교수가 발표한“제주도의 불교 수용과 역사적 전개”내용을 실었다.<편집자주>

 

 

제주도의 불교수용과 역사적 전개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전영준 교수

제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특히, 고려 중기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역사문화적 전통이 이어졌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민간신앙과 혼재되어 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불교와 제 신앙 간의 결합 또는 습합의 결과이지만, 제주인의 삶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하여 현세구복의 염원을 풀어내는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강화되는 종법질서의 강화와 성리학 이념의 확장으로 제주 불교는 중앙의 불교와 같은 쇠락의 길을 걷기도 하였다. 특히 사찰과 신당을 훼철하고 성리학의 정착을 목적으로 하였던 목사의 부임은 제주불교의 어려운 역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불교는 무속과 습합하면서 개인적 신앙 형태를 이루어갈 정도로 제주인의 신앙형태는 지속되고 있었다. 
본고에서는 고대시기 탐라에 전래되었다는 불교 전래설부터 시작하여 고려,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개 양상을 대략적이나마 검토하겠다. 남방불교의 전래에 대한 이야기들도 결국은 탐라국이 해상활동을 통해 얻었던 외국과의 교류가 단초가 되는 것이며, 외국의 사서에서도 탐라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삼국시대에 교류 흔적과 불교의 전래 가능성 등은 현재 제주에서 발굴 보고된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교류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명(寺名)과 20여 곳의 사찰이 중앙문화의 제주 이입과 더불어 조선 전기까지 신앙 형태를 공고히 한다는 점에서 역사문화적 의미가 있다. 
조선후기에 훼철되는 사원을 비롯한 신당의 파괴 등도 정신문화의 계도라는 명분으로 이루어지고 있음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유배자들과 목사 등의 관리들의 불교나 무속에 대한 인식도 일조하겠지만, 여전히 불교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전근대 제주 사회의 불교와 무속에 대한 개괄적인 검토를 통하여 제주 불교의 역사적 전개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제주불교는 무속과 습합하면서 개인적 신앙 형태를 이뤄갈 정도로 제주인의 신앙형태는 지속되고 있다.

Ⅱ.제주도의 불교 수용 관련 제설(諸說)의 검토

1.남방불교의 유입설
제주도에 불교가 일찍 전래되었다는 근거는 몇 건의 문헌 기록과 외국사서의 탐라 교류 기록이다. 그리고『고려대장경』에 당나라 현장 스님(602~664)이 645년에 번역한 『법주기』의 기록과, 무오사화(1498년)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1506년)으로 풀린 홍유손(1431~1529)의『소총유고(篠叢遺稿)』중「존자암개구유인문(尊者庵改構誘引文)」에 “존자암은 삼성이 처음 일어났을 때 만들어져서 삼읍이 정립된 후까지 오래도록 전해졌다”는 기록이다. 이를 근거로 하면 3성의 존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만 을나신화의 정립 시기가 모호한 상황이어서 출발점을 정하는 데는 애로가 있다. 그러나 3읍은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으로 1416년에 성립되었기 때문에 조선 초기까지 존재했음을 확인하는 1차적인 근거가 된다. 
이능화(1869~1934)는 당 현장의 『법주기』의 기록을 활용하여『조선불교통사』에서 “16나한이 각각 사는 곳이 있었는데, 여섯 번째 발타라존자는 9백 아라한과 더불어 탐몰라주에 나누어 살았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탐몰라주는 곧 탐라를 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제주이다.”라고 하여 남방으로부터 제주도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를 추측하게 한다. 이러한 주장은 난제밀다라에 의해 탐몰라주가 언급된 시기가 A.D. 344년이어서 현재까지 제주고고학의 성과에 따른 탐라국의 개국 시기도 A.D. 300~400년 무렵이라는 추정과 비슷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탐몰라주’가 반드시 ‘탐라’라는 확인도 어려워서 탐라 개국 시기에 전래되었다는 논지는 타당성이 낮은 편이다. 또, 존자암에 대한 발굴조사(1993~1994년)에서도, 부도(浮屠), 배수시설과 기와편, 분청사기편, 백자편 등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탐라국 시기의 것으로 판단되는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도 남방에서 제주로 불교가 직접 전래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실정이다. 
한편, 외국의 탐라 기록과 관련하여 많은 연구가 있어서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즉, 탐라와 주변국과의 교류는 상호간의 문화 접촉도 가능하게 하므로 중국과 일본, 동남아 지역을 왕래하던 선박들의 중도 기항지로 해상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해왔다. 1928년 제주항 축항 공사 때 발견된 중국 한나라 시대의 화폐인 오주전과 신나라의 화폐인 화천 ,대천오십, 화포 등의 일괄 유물은 1세기경의 제주도가 중국과 한국, 일본을 연결하는 무역로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였거나 간접무역의 증거로 생각된다. 제주도의 과거 유물 유적의 분포가 대부분 제주도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중국이나 한반도로부터의 선진문물의 유입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헌상으로 볼 때, 제주도에 관한 기록은 우리나라보다는 중국의 역사서에 먼저 나타나고 있다. 이 점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이전의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제주도의 경유, 기원후 3세기 중국 삼국시대의 기록인『삼국지』「위서」동이전에 나오는 ‘주호’에 관한 기록이다. 
주호는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다. 그들은 대체로 키가 작고 말도 한족과 같지 않다. 그들은 모두 선비족처럼 머리를 삭발하였으며, 옷은 오직 가죽으로 해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옷은 상의만 입고 하의는 없기 때문에 거의 나체와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나라에서 물건을 사고판다. 
이 기록에 대해 혹자는 당시 제주는 미개한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배를 이용하여 이웃 나라와 거래하였다는 내용으로 보면 제주의 풍습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옷감을 직조하지 않고 가죽옷으로 생활한다고 하여 미개한 사회로 보는 것보다는 이 기록의 주체가 중국이어서 타국을 낮추어 보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라 생각한다. 

2. 탐라국시대 문화교류와 불교 전래설
탐라국시대의 문화교류 기록도 확인할 수 있는데,『삼국사기』의 기록에 탐라국은 백제, 신라와 각각 교역한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660)한 직후에는 바다 건너 일본이나 당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이 무렵 중국의 『신당서』의 기록에는 용삭 초년(신라 문무왕 원년, 661)에 담라(擔羅)가 있어서 그 왕 유리도라가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였는데, 나라는 신라 무주의 남쪽 섬에 있으며, 풍속은 순박하고 비루하며, 큰 돼지의 껍질을 입고 여름에는 가죽으로 만든 집에 살고, 겨울에는 굴 같은 집에 산다. 땅에서 오곡이 나는데 경작에 소를 쓸 줄 모르며, 쇠로 만든 갈퀴로 흙을 일군다. 일찍이 백제에 복속하였다가 인덕 추장이 내조하여 황제를 따라 태산에 이르렀으며, 후에 신라에 복속되었다. 
고 하였다. 이 기록에는 당시의 탐라를 담라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음이 확인된다. 『삼국사기』와 중국의 여러 문헌에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음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지만, 지속적으로 당시의 탐라에 대한 관심을 두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같은 시기의 기록인『당회요(唐會要)』탐라국조에는 탐라는 신라의 무주 해상에 있다. 섬 위에는 산이 있고 주위는 모두 바다에 접하였는데, 북쪽으로 백제와는 배를 타고 5일을 갈만한 거리이다. 그 나라 왕의 성은 유리이고 이름은 도라인데, 성황은 없고 다섯 부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들의 집은 둥글게 돌담을 둘러서 풀로 덮었으며 호구는 8천 가량 된다. 활과 칼 및 방패와 창이 있으나 문기는 없고 오직 귀신을 섬긴다. 항상 백제의 지배하에 있었고 용삭 원년(문무왕1, 661)8월에는 조공 사신이 당 나라에 이르렀다. 
위의 기록에서는 당시 탐라의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탐라의 지리적 거리와 위치, 명칭, 왕, 풍속, 가축, 성곽, 신앙, 거주지 모습, 무기, 인구 등에 대해 대략적인 해석이 가능하며 호구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아울러 이 당시 탐라국과 일본 사이에는 오랫동안 사신 왕래가 있었으며, 교역도 이루어져서 탐라방보와 탐라복 등의 물품을 일본에 수출하였다. 백제의 부흥운동 때에는 탐라국에서도 군사를 파견하여 일본과 함께 백강 전투에서 싸웠다. 
『고려사』「지리지」에 의하면, 성주와 왕자의 호칭은 탐라 왕족인 고후, 고청 등 세 형제가 신라의 왕을 만났을 때 신라왕이 그들에게 성주, 왕자, 도내의 작위를 주었던 데서 유래한다. 고려 태조도 신라의 예를 따라 末老에계 성주, 왕자의 작위를 주었다. 특히 성주는 국왕을 지칭하며 또 성주는 거의 독립적인 자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들을 태자 세자라 칭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하였던 명칭인 ‘성주’는 일반적으로 청하는 성주로 오해할 여지가 있는데 다른 곳과 달리 유독 탐라에서 ‘성주’라고 하였던 점은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앞의 기록에서 탐라인들이 배를 이용한 무역을 전개하고 있음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항해를 할 수 있었던 항해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때문에 밤하늘의 별자리를 활용하였던 야간항해술을 생각해 볼 수 있으므로 탐라의 성주는 여타 지역의 명칭과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즉 외부와의 무역을 상정할 수 있는 탐라는 삼국시대인 4~5세기에 족장들이 다스리는 체제로 유지되어 독립된 나라에 존재하다가 고려 숙종 때 군현으로 편입된 독특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때문에 제주도의 문화는 모두 한반도로부터 유입되었다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려는 시각을 견지할 필요가 있고, 이를 통해 제주불교의 전래설에 대한 또 다른 시각도 개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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