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월출산 도갑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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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월출산 도갑사 (1)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1.24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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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56)
풍수지리를 집대성한 도갑사 창건주 도선국사 진영

우리나라 책 중에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는 아마도 유홍준 선생이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일 것이다. 1993년 1권이 처음 출판된 이후 작년 서울편인 9권, 10권이 출간되었고, 이미 출간된 일본편 4권을 합하면 지금까지 총 14권이 시리즈로 출판되었다. 저자는 앞으로 서울에 관해 두 권을 더 쓰고 시리즈를 마칠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까지 이 시리즈의 책이 400만 부 가까이 팔렸다고 하니 이 기록은 쉽게 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우리나라 구석구석은 물론 북한 지역 일부와 일본까지 망라하고 좋은 입심으로 재미까지 있으니 나중에 누가 답사기를 쓰려고 해도 김이 빠져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 같다.
1993년에 1권 ‘남도 답사 일번지’라는 소제목이 달린 책이 출판되자 당시 일 년에 강진을 찾는 외지 관광객이 8만에서 10만 정도 되었는데 그해 여름에만 50만 명이 넘게 찾아와 나중에 강진군에서는 유홍준 선생을 명예 군민 1호로 삼았다고 한다. 100만 권 이상 팔린 첫 번째 책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남도 답사 일번지>의 첫 장 제목이 ‘아름다운 월출산과 남도의 봄’이다. 강진과 해남을 답사기의 맨 앞 장에 소개하였는데, 저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기에는 뜻있게 살다간 사람들의 살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픔 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이 있고,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에 서려 있는 역사의 체취가 살아 있으며, 이름 없는 도공, 이름 없는 농투성이들이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 꿋꿋함과 애잔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향토의 흙내음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조국 강산의 아름다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산과 바다와 들판이 있기에 나는 주저 없이 ‘일번지’라는 제목을 내걸었다.’  

책에서 처음 소개되는 곳이 월출산과 아침나절 산안개가 걷힐 때 가장 아름답다고 한 도갑사(道岬寺)이다. 월출산은 북쪽이 날카롭고 가파른 돌산이고 남쪽은 부드러운 흙산인데 특히 특이하게 생긴 바위가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남국의 소금강이라고 불린다. 월출산 최고봉인 천왕봉에서 보는 첩첩이 겹친 소백산맥의 능선 위로 펼쳐지는 일출과 서해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일몰, 도갑사 입구에 자리 잡은 구림리에서 보는 월출 광경은 호남 제일의 장관이라고 한다. 
도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신라 말 풍수지리로 유명한 도선(道詵)국사가 창건하였다. 원래 도갑사가 있던 자리에는 문수사(文殊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어린 시절 문수사에서 지냈던 도선스님이 후에 새 절을 짓고 도갑사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도선스님을 국사로 추증(돌아가신 뒤에 직위를 내리는 것)할 정도로 숭상했기 때문에 절이 크게 번창하여 전성기를 누렸다. 불교를 억압한 조선시대에도 그 위세를 잃지 않아 세조 때 수미(守眉)대사와 신미(信眉)대사가 왕실의 지원을 받아 966칸에 달하는 절집을 만들었고, 성종 때는 중수했다고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많은 문화재가 유실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것들도 일제시대와 6.25 전란을 겪으며 대부분 소실되었다. 게다가 1977년 화재로 대웅보전과 그 안에 모셔진 성보들이 소실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1981년 대웅보전 복원을 시작으로 복원불사가 이루어져 옛 가람의 모습을 잡아가고 있다. 워낙 많은 유물이 소실되어 남아 있는 게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보 2점과 보물 3점이 남아 있으니 과거 지금보다 훨씬 컸을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국가 지정문화재로는 해탈문(국보 제50호), 월출산에 있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 미륵전에 있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목조 문수 보현 동자상(보물 제1134호), 절 마당에 자리 잡고 있는 고려시대 오층석탑(보물 제1433호)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도선수미비, 수미왕사비, 석장승, 물을 담아두는 석조 등이 있다. 

제작하는데 17년 걸린 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


사실 도갑사는 절집들이 대부분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보니 오래된 절에서 느낄 수 있는 단아한 느낌을 찾기는 어렵다. 국보로 지정된 해탈문도 조선 초기인 1473년에 지어졌다는 기록이 있고, 건축 기법 상 다른 건물들과 특이한 면이 있어서 국보로 지정되었지 특별히 모습이 아름답다거나 눈에 띄게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성보박물관에 모셔진 목조 문수 보현 동자상이나 절 마당의 고려시대 오층석탑은 아담하고 앙증스럽다. 이처럼 도갑사에 있는 유물이나 건물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미륵전에서 산 쪽으로 조금 올라가는데 곳에 자리 잡은 비각에 있는 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는 볼 만하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묘자리를 보거나 집터를 볼 때 땅을 볼 줄 아는 분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이렇게 땅의 좋고 나쁨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준다고 하는 생각은 풍수지리설에서 나왔다. 이러한 풍수지리에 대한 이론을 우리나라 특성에 맞게 집대성한 분이 통일신라 말기에 활약한 도선스님이다. 도선스님이 태어난 곳이 바로 도갑사 인근인 영암 구림리(鳩林里)이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스님의 어머니 최씨(崔氏)가 빨래를 하다가 물 위에 떠내려 오는 오이를 먹고 아이를 잉태하여 낳았으나 이를 부끄럽게 여겨 아이를 숲속에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아이를 날개로 감싸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 기르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겨 아이를 문수사에 맡겨 기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비둘기 구(鳩)자가 들어가는 구림리라는 마을 이름도 이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도선스님은 15세 때 화엄사에서 머리를 깎고 동리산 혜철(惠哲, 785-861) 큰스님에게 수학한 후 명산대천을 돌아다니며 수행하다 광양 옥룡사를 중창해 머무르다 통일신라 말기인 898년 입적하였다. 도선국사는 땅 기운의 성쇠에 따라서 왕조의 흥망이 결정되지만 땅의 결함을 사람의 힘으로 보충하여 기운을 왕성하고 순하게 돌릴 수 있다는 비보설을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라 지맥이 약한 곳은 흙을 돋우어 보강하고, 산형이 험한 곳은 바위를 깎아서 순하게 하는 비보사찰과 비보탑 이론이 나오게 되었다. 
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는 도갑사 창건주인 도선국사와 조선 세조 때 도갑사를 중창한 수미선사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총 높이 5.17m로 비석을 받치고 있는 돌거북은 아마도 현재 남아있는 거북받침 중 가장 큰 것 중 하나일 것이다. 큼직한 크기에 고개를 왼쪽으로 튼 모습이 생동감이 있고, 비석 머리의 용조각도 아주 정교하다. 
비문에 의하면 1636년(인조 14)에 건립을 시작하여 1653년(효종 4)에 완성했다고 하니 비석 하나 만드는데 17년이나 걸렸다. 도중에 어떤 일화가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글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황제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한 내용을 쓴 삼전도비문을 쓴 영의정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한석봉의 제자 오준이 썼다. 
 도갑사에 가면 우리나라 풍수지리 이론을 완성한 도선국사의 비석과 국사전에 모셔진 그분의 진영을 보고 도갑사가 자리 잡은 위치가 어떠하며, 오늘날 복원불사가 주변 경치와 잘 어울리는지 가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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