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의 공덕 ‘제주’ 위해 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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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의 공덕 ‘제주’ 위해 회향
  • 이병철 기자
  • 승인 2018.02.19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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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 초대석 - 문대림 전 청와대 청불회 수석부회장

불기2562년 무술년 새해를 맞아 문대림 전 청와대 청불회 수석부회장을 역임한 문대림 불자를 제주불교신문 지면에 초대했다. 
부처님 같은 지혜로 제주를‘정토 세상’으로 만들겠다고 마음을 다진 문 전 수석부회장을 지난 2월 12일 본지 사무실에서 만났다. 
 <편집자 주>

문대림 전 청불회 수석부회장의 부인 이맹숙 씨 집안은 삼촌 두 분이 출가할 정도로 돈독한 불자로 부부의 인연도 부처님이 맺어주었다.

 

■ 청와대 불자들의 신행모임인 청불회의 산파역할을 했는데 청불회 지도법사이신 혜국 스님(석종사 금봉선원장)도 그 공덕을 높이 샀다. 꺼져가던 청불회를 다시 지피는 과정 속에 어려움과 더불어 뿌듯함도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청불회 창립 배경과 그 소회는?
△문대림 전 청불회 수석부회장 = 청와대 입성 후 신행활동을 하고 싶었으나 청와대 불자들의 모임(청불회)은 실체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정권이 교체되면서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봅니다. 청불회를 재건하는 일이 내게 주어진 의무감임을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조계사를 찾아가서 청불회 재건을 의논했고, 평소 존경하던 혜국 스님(충주 석종사)을 설득 끝에 지도법사 수락을 받았습니다. 또, 영배 스님(통도사)으로부터 지도법사를 수락받는 등 청불회 재건을 위한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사무국장과 간사 등 저를 중심으로 한 인맥들이 청불회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석부회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2018년 첫 법회에 혜국 스님을 청와대로 초청, 청와대 불자들에게 큰 가르침이 되는 법문을 듣는 등 그 초석을 쌓았습니다. 그때 혜국 스님께 효재(曉載)라는 법명을 받는 등 개인적으로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아들을 살렸다’라고 할 정도로 어머니의 불심이 지극했다고 들었는데 어릴 적 불연으로 만난 부처님과의 만남은? 
△문대림 전 청불회 수석부회장 = 7남매 중 막둥이로 태어나 천방지축으로 제주 들판과 바다를 누비며 살았던 저는 또래에 비해 컸던 터라 삼삼오오 짝을 이뤄 다닐 때면 늘 맨 앞줄이 내 자리였습니다. 뒷산에 장난삼아 놓은 불이 번져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했던 기억이며, 바다에 빠져 죽을 고비도 수도 없이 넘겼던 오싹한 추억은 지금도 친구들과의 모임에 단골 소재입니다. 친구들은 나를 “운 좋은 놈”이라 부릅니다. 
지금도 어머니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첫 번째 죽을 고비는 물 애기 시절 어머니가 밭에 비료를 주러 간 사이 작은 형이 애기구덕을 보릿단에 넣어놓고 놀러간 것입니다. 짚단 사이에 눌려 숨이 잠깐 멎었던 나는 어머니의 눈물 덕에 살았습니다. 걸음마를 막 시작할 무렵,  빨래터에 어머니를 따라갔다가 연못에 빠져 죽음과 맞닥뜨린 적도 있었습니다. 평소 어머니가 부처님께 기도드린 공덕으로 지금의 생명을 잇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늦둥이로 본 막내아들 때문에 우리 어머니 속은 바닷가 마른 소금이 눌러 앉은 바윗돌처럼 어석거렸을 것입니다. 그 속 타는 마음을 부처님 전 기도로 이겨냈을 어머님을 생각하면서 사찰을 찾는 내 모습을 보곤 합니다.

■부인도 불심이 돈독하다고 들었는데 두 분의 인연과 그리고 문 전 수석부회장에게‘이맹숙’이란 인생도반은? 
△문대림 전 청불회 수석부회장 = 부인의 삼촌 두 분이 출가한 스님이십니다. 그런 환경 때문인지 아내와 부처님의 인연은 자연스러웠습니다. 부부가 같은 종교를 갖고 수행한다는 이 또한 인연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심은 아내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하지만 현실 정치인으로서의 치열함과 긴장감이 연속인 생활을 하고 있기에 아내의 기도는 내 삶의 큰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정치인이라는 삶이 평범하지 않기에 한편으론 아내가 안쓰럽기도 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싫은 내색하나 하지 않고 오히려 큰 용기를 주는 제 외호신장 같은 사람입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학자의 꿈을 꾸셨다는데 정치인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30여년의 삶과 그 과정을 되돌아본다면?
△문대림 전 청불회 수석부회장 = 지역에서 초·중·고를 졸업하고 제주대 법대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생활 하는 가운데 잠시 한국대학생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다가 의식화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언더그라운드 동아리를 조직하며 본격적인 반독재 투쟁을 주도하는 운동권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길을 걷는 과정 속에 선배인 고창후(전 서귀포시장) 변호사의 부친이 서귀포시청 직원이었습니다. 아들이 시위를 하다가 제적되는 모습을 보고, 고진부 신경정신과에 입원하게 됩니다. 당시 고진부 원장이 아버지의 병은 아들이 원인임을 바로 알고,  고창후 선배를 설득한 끝에 2년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합니다. 당시 저는 학자의 길을 걸으려고 할 무렵인데 의형제를 맺고 있는 고 선배가 사법연수원 시절이었고, 고진부 원장이 국회의원 출마를 함에 따라 선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16대 국회서 고진부 원장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4년 동안 국회의원 수석보좌관(4급)을 맡고, 여의도 생활을 하면서 국가정책의 수립·집행과정과 국가 예산의 편성·심의·집행 등의 국정 실무를 경험하는 소중한 기회가 됐습니다. 
이에 앞서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하며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하는데 그 당시 지구당 정책실장, 청년위원장, 대변인, 도당사무처장 등을 역임 하면서 일선 현장에서 많은 지역민이 민원을 이해와 요구를 해결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제주관광대학, 방송통신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학생들과 제주관광산업의 비전과 가치를 공유했던 추억도 성숙한 제주의 비전을 제시하는 밑거름으로 작용했습니다.
2006년 고향인 대정읍을 지역구로 제주도의회에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5명의 후부자가 출마했는데 제가 지지율이 1.8%였습니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도의회에 입성했고, 2000년에는 전국 광역도의회 최연소 도의회 의장을 역임하는 등 도민들의 성원이 제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는 큰 자산이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 같은 지혜로 제주를‘정토 세상’으로 만들겠다고 마음을 다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제주를 꿈꾸시는지요? 
△문대림 전 청불회 수석부회장 = 이번 6‧13 지방선거는 첫째, 지난해 국민들의 뜨거웠던 촛불 혁명을 제주지역에 완성하는 것입니다. 둘째, 중앙 정부와 제주도 간의 소통을 이뤄내는 일입니다. 현재 제주는 중앙 정부로부터 고립되어 있습니다. 이는 현 도지사의 독선과 독단이라는 속에 지역민의가 중앙에 전달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제주도의 가장 큰 손실입니다. 
저는 중앙 정부와의 협의와 소통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저는 5년 동안 문재인 대통령을 보좌하며 국회에는 국회의원, 정부에는 장, 차관 등 문재인 정부를 지탱하고 있는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지방정부는 무엇보다 대 정부와의 소통이 중요합니다. 이 같은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위기에 처한 제주도 바로 세우는데 헌신하겠습니다.
또한 제가 제주도를 위해 역할이 주어진다면 첫째 기초단체를 부활하겠습니다. 제주특별자치도 자치행정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데 공론화를 통해 다음 총선 때는 국민투표에 붙이겠습니다. 시장 직선제와 기초의회 구성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둘째, 제주의 독점적인 자원을 경제 성장의 모델로 삼겠습니다. 제주는 타 지방에 비해 성장 가능성이 높은 내성적 자원, 즉 해양과 산림을 경제 산물로 이뤄내 수익구조를 창출해 내겠습니다. 
셋째, 제주도의 수용력입니다. 제주 환경과 사회 그리고 경제, 인문 등의 분야에서 제주의 정체성은 지켜내면서 제주의 지속 발전 가능한 정책을 펼쳐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안에서 무한한 지속 가능한 정책들을 펼쳤을 때 그것이 바로 제주불교가 말하는 불국토요, 문재인 정부가 밑바탕에 깔고 있는 자비이자 나눔의 정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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