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월출산 무위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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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월출산 무위사 (1)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2.2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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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57)

남도 답사 일번지인 강진에는 볼거리들이 다양하다. 그 중 한 곳이 월출산 남쪽에 위치한 무위사(無爲寺)이다. 강진 읍내에서 무위사로 들어가다 보면 왼쪽 차창 밖으로 월출산 남면 능선이 나타난다. 뾰쪽한 바위 봉오리들이 가지런히 늘어진 모습이 감탄과 함께 마음을 즐겁게 만든다. 그 능선 자락 중 하나가 나지막하게 내려와 무위사를 포근히 감싼다. 풍수를 모르더라도 무위사에 들면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산자락 끝 편평한 구릉지에 자리한 절집을 낮은 능선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대 문화재 답사 열풍을 일으킨 유홍준 선생이 남도 답사 일번지의 첫 기착지를 무위사로 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쁜 도회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무위사가 보여주는 한적하고 질박하며 단아한 아름다움은 분명 낯선 것인데도 친근함을 준다. 무위사를 들러싼 산자락이 어머니 품안처럼 편안하고 그 안에 자리한 극락보전의 아담하고 단정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무위사 극락보전 1430년 국보 제13호침계루 현판


 무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절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으로는 조선 후기인 1739년에 당시 주지인 극잠(克岑) 스님이 쓴 『무위사사적(無爲寺事蹟)』과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들 수 있다. 
 먼저 『무위사사적』에 의하면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 원효국사가 처음 짓고 관음사라 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헌강왕 원년(875)에 풍수지리로 유명한 도선(道詵)국사가 중창해 절 이름을 갈옥사(葛屋寺)로 바꾸고, 고려 정종 원년(946)에 선각(先覺)대사가 다시 중창하여 이름을 모옥사(茅屋寺)로 고쳤다고 한다. 그 후 조선시대 명종 10년(1555)에 태감(太甘)선사가 오래된 절집들을 보수하고 이름을 무위사로 고쳤는데, 당시 비로전, 미타전, 영산전, 문수전 외에 승방, 요사가 여러 채 있었고, 인근의 암자가 35곳이나 된 큰 절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무위사는 월출산에 있으며 개운 3년(946)에 승 도선이 창건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였으므로 이제 중수하고 수륙사(水陸社)로 삼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기록의 내용을 그대로 모두를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다. 대개 오래된 절들은 자신들의 절이 유서가 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직접 연관이 없음에도 아도, 원효, 의상, 도선대사 등 유명한 스님과 관련 있다고 과장하는 경우가 많다. 무위사 경우에는 그러한 과장이라기보다는 책이 편찬될 당시 전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고증하지 않고 기록해서 나타나는 문제인 것으로 여겨진다. 먼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617년 당시 이 지역은 백제의 영토여서 신라의 승려가 절을 짓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고 617년은 원효스님이 태어난 해이므로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다. 또한 875년에 도선국사가 중창했다는 내용은 월출산 지역이 도선국사가 탄생한 지역이고 도갑사에 도선국사수미선사비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도선국사와 어떻게든 관계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절에 전하는 가장 오래된 유물인 보물 제507호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도선국사의 중창설에 의문이 생긴다. 탑비의 내용에 따르면 선각대사는 『무위사사적』에 언급된 분으로, 법명은 형미(逈微), 속성은 최씨이다. 신라 헌강왕 8년(882)인 18세에 구례 화엄사에서 계를 받고 가지산 보림사 보희(普熙)선사에게 배운 후 당나라에 가서 공부하다 905년에 귀국하여 강진 무위갑사에서 8년 간 머물렀다. 탑비는 대사가 입적한지 28년 후인 946년에 만들어졌다. 이 기록에 근거해서 보면 『무위사사적』에 선각대사가 무위사를 중창했다고 한 946년은 선각대사가 입적한지 28년이나 지난 탑비를 세운 시기를 혼동하여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선각대사가 905년부터 8년 간 무위사에 머물렀다는 탑비의 내용을 감안하면 875년에 도선국사가 절을 중창하고 3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아 다시 선각대사가 절을 중창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도선국사는 동리산문에 속했고 선각대사는 가지산문에 속했기 때문에 사찰 소속이 짧은 기간 내에 바뀌었다는 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도선국사가 중창했다는 내용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또한 절의 이름도 조선시대에 와서 무위사로 바뀐 것이 아니라 선각대사가 있었던 시기에 이미 무위갑사로 불리고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정리하면 무위사는 통일신라 말기인 905년 이전에 창건되었고, 당시 무위갑사라고 불리어지고 있었으며 선각대사가 머물던 시기에 사세가 확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세종 12년(1430)에는 오늘날 무위사에서 가장 중요한 절집인 극락보전을 짓고 그 안에 아미타삼존상을 모셨다. 그리고 성종 7년(1476)에는 극락보전 안에 아마타삼존도와 아미타내영도 등 벽화를 그려 장식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극락보전의 건립은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이 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행수륙재가 왕실의 돌아가신 분들이나 전쟁이나 큰 난리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천도재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1983년 극락보전 수리 당시 도리에 기록된 묵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목재에는 1430년 극락보전 건립 당시 화주와 관리자들의 명단이 쓰였는데 그 중 효령(孝寧)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는데 바로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 이보(李補, 1396-1486)인 것으로 추정된다. 불심이 깊은 효령대군이 인근에 있는 백련사 중창 불사에도 참여했던 점을 감안하며 무위사 극락보전을 짓고 수륙재를 지내는 데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극락보전이 서방정토를 주관하는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는 공간이므로 극락보전 앞에 있는 괘불대에 괘불을 걸어 수륙재를 올렸을 것이다.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전란은 피했지만 흐르는 시간은 막을 수 없었는지 오늘날 무위사에 있는 절집들은 극락보전을 제외하고 대부분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무위사에 있는 주요 성보문화재는 선각대사편광탑비(보물 제507호) 외에는 극락보전과 관련된 것들이다. 극락보전은 국보 제13호이며 극락보전 안에 있는 불단 벽에 그려진 아미타여래삼존 벽화(국보 제313호), 아미타삼존 불상(보물 제1312호), 삼존 벽화 뒷벽에 그려진 백의관음보살 벽화(보물 제1314호), 내벽 사면에 그려진 벽화 (보물 제1315호)가 그것이다. 
 천 년이 넘은 선각대사편광탑비와 600년 가까이 된 무위사 벽화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보물 중 보물이다. 무위사 극락보전 앞마당에 있는 400년 된 팽나무와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600년 전에 지어진 단아한 극락보전을 보며 ‘무위(無爲)’의 뜻을 새겨보자.

 

신문 사찰순례편에 제목이 잘못 나갔음을 양해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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