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이 있는 곳은 어디나 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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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이 있는 곳은 어디나 도량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2.28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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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혹한의 추위가 물러가고 봄 햇살이 비추며 봄꽃들이 꽃망울을 맺고 꽃향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계절의 변화에 즈음해서 정유년 동안거도 해제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안거했던 시간이 끝났다고 해서 수행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다시 새로운 수행으로 이어지면서 우리의 마음도 더욱 부처님의 마음과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번 호 사자후에서 법정 스님은 도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하는 곳이면 어디든 도량이라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곳이 도량이라는 말씀입니다. <편집자주>

법정 스님 (1932년~2010년)1954년 효봉 스님의 제자로 출가했고 1970년대 후반에 송광사 뒷산에 손수 불일암을 지어 지냈다. 2010년 성북구에 위치한 길상사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입적했다. 1932년 11월5일 전남 해남군 우수영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목포상업중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전남대 상대에 입학하여 3년을 수료했다. 당시 일어난 한국전쟁을 겪으며 인간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대학교 3학년 때인 1954년에 출가를 결심했다. 그리고 오대산으로 떠나기로 했다가 눈길로 인해 차가 막혀 당시 서울 안국동에 있던 효봉 스님을 만나게 되고 효봉 스님과 대화를 나눈 뒤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에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1956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으며,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 강원에서 명봉 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석 달 동안 수행 잘하셨습니까? 지난 결제일에 저는 이 자리에서 도량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곧은 마음 직심直心이 곧 도량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디에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 정직한 마음, 분별과 집착을 떠난 평온한 마음이 도량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수행이 있는 곳은 어디나 도량’입니다. 

 부처님 계신 도량 어디인가
오늘 이 자리가 바로 그 자리


원래 도량이라는 말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를 이룬 인도 보드가야의 ‘보리도량’에서 나온 것으로 깨달음을 얻은 장소를 가리킵니다. 흔히들 어떤 특정한 장소에 집착하여 꼭 그곳을 찾아가야만 기도와 수행이 이루어진다고 착각합니다. 이는 도량의 본래 뜻에서 벗어난, 비본질적인 관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가장 이상적인 도량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해인사 장경각의 법보전 양쪽 주련에는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란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원각도량하처, 원각도량이 어느 곳인가, 원만하게 깨달은 부처님이 계신 도량이 어딘가 하는 물음입니다. 현금생사즉시, 오늘 이 자리가 바로 그 자리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숨 쉬고 행동하는 현실 자체가 부처님 세계라는 응답입니다. 바로 그곳이 원각도량입니다. 즉 극락세계가 어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2500년 전 인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몸담아 사는 그 자리가 곧 더없이 훌륭한 도량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절에 가면 보게 되는 주련 글귀들이 다 훌륭한 법문입니다. 부처님 경전에서 인용한 법문이기 때문입니다. 건성으로 구경하거나 장식품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 내용의 의미를 알아 법문으로서 받아들이면 살아가는 데 지침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제가 경험한 도량이야기를 하겠습니다. 20년 전 제가 처음 인도에 갔을 때 겪은 일입니다. 
산치 탑을 참배하고 나서 아잔타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산치 탑으로 가려면 뉴델리에서 급행열차로 14시간 30분이 걸립니다. 
그리고 다시 산치에서 아잔타까지는 보팔에서 뭄바이 행 열차를 타야 합니다. 보팔은 제가 그곳에 가기 5년 전(1984년) 미국 기업 유니언 카바이드 사의 독가스 공장이 폭발하여, 2500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도시입니다. 
보팔에서 밤기차를 타야 하는데, 승차권은 있어도 좌석이 없다고 했습니다. 입석입니다. 그다음 날도 좌석은 보장할 수 없다고 하기에 하는 수 없이 그 기차를 타야만 했습니다. 인도는 단체가 아닌 개인이 여행하기에는 교통수단이 아주 열악한 곳입니다. 20년 전의 사정이 그러했습니다. 
겨우 열차에 올랐지만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었습니다. 통로까지 사람이 꽉 들어차 다들 바닥에 앉거나 누워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살피다 보니 화장실 옆 통로 한쪽에 겨우 한 사람이 앉을 만한 틈새가 눈에 띄었습니다. 인도의 열차는 객차와 객차 사이가 막혀 있고 창문마다 철책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자리 잡은 곳은 좌우로 두 개의 화장실이 소위 인도식과 서양식이 마주하고 있는 출입구였습니다. 

분별과 집착 떠나 내가 내 마음
다스리는 깨달음 얻은 곳이 도량


어쩔 수 없이 바닥에 숄을 깔고 앉았습니다. 두 화장실 틈바구니에서 밤을 새울 걸 생각하니 무척 난감했습니다. 오기로 버티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렸습니다. 그때마다 역겨운 지린내를 맡아야 하고 배설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나는 왜 이런 고생을 하면서 여행을 계속해야 하나?’
처음에는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자정이 되자 문득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나는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라 부처님의 성지를 순례하러 나선 수행자가 아닌가. 옛날 구법승들은 오로지 두 발로 걸어서 그 험난하고 위험한 열사의 사막길을 건너왔는데, 그래도 나는 항공기와 열차를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다른 승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먼지 바닥에 주저앉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한다. 똑같은 인간인 내가 저들이 견디는 일을 견딜 수 없다면, 나는 저들과 같은 인간 대열에도 낄 수 없을 것이다. 저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겪는 일을 나라고 못할 게 무엇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문득 ‘관념의 차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 순간부터 화도 불만도 사라지고 마음이 더없이 평온해졌습니다. 
그토록 혼잡한 열차 안이었지만, 그날 밤에는 당시의 인도 여행 중에서 가장 맑고 투명한 의식 상태를 지닐 수 있었습니다. 그 화장실 앞에서 어떤 성지에서보다도 평온하고 순수한 의식 상태를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 6시, 아잔타 석굴에서 가장 가까운 60킬로미터 거리의 잘가온 역에 도착할 때까지 저는 지극히 평온한 선열에 충만해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선정삼매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 전날 14시간 반이나 기차를 탔고, 지난밤에도 8시간 반을 그 틈새에서 지냈는데 전혀 피로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 화장실 앞 틈바구니가 저에게는 고마운 도량이었습니다. 그 어떤 선원이나 명당보다도 고마운 도량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지옥이 천당으로 변할 수 있고, 천당이 지옥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도하고 수행하는 도량을 어떤 특정한 장소로 한정 짓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이 곧 도량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가정이나 일터가 진정한 도량이 되어야 합니다. 어수선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돈스러운 세상에서 도량이 없으면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버립니다. 분별과 집착을 떠나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리는 깨달음을 얻는 곳이 곧 도량입니다. 좌청룡, 우백호 다 갖춘 명당에 있어도 직심이 없으면 전정한 도량이 아닙니다. 이상적인 도량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그대가 있는 바로 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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