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나 스스로가‘보호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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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나 스스로가‘보호존’입니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3.07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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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지상법문은 달라이라마 법문을 실었습니다. 달라이라마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데도 어째서 마음의 평화와는 대비되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는 물질적 풍요로움 안에는 탐욕과 불안과 경쟁심이 내재하기 때문에 명예와 권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가가 가장 큰 화두입니다. 달라이라마의 법문에서 그 답을 찾으면 어떨까요.  <편집자주>

 

오늘 법문은 깨달음으로 향하는 게송과 밀교의 차제를 주제로 합니다. 외도와 불교도의 차이, 대승과 소승의 차이 그리고 현교와 밀교의 차이를 아우르는 주제를 요약해 그 핵심을 다루겠습니다. 처음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배워 실천하여 그 수승한 가르침의 참의를 알아 수행한다는 목적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도차제섭의』는 총카파 대사 본인의 수행 기록이자『해심밀경』의 요의입니다. 붓다의 경전과 선지식의 논서를 배워 내 수행의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나’에 의한 인과입니다. 
‘나’는 오온에 의지하여 존재하며 
  오온에 의지하지 않고 
  따로 존재하는 나란 없습니다



현재 우리의 삶에 종교가 과연 어떤 도움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눈부신 문명의 발달이 진행 중인 이 시간에도 법회가 열리고 있는 다람살라의 전기 사정은 열악합니다. 각자의 삶이 지닌 상황에 따른 문명의 척도이겠으나, 실제 주된 삶에서 얼마나 불법을 만나고 사유하는가와 비교해보면 매우 상대적인 경험일 것입니다. 과거 농경 사회에서는 종교를 통해 자연의 절대로부터 위안과 희망을 찾고자 했다면, 현대는 기계 문명의 발달로 과학이 종교의 역할을 일부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에 의해 인류는 그들이 원하는 물질적 행복을 제공받고 있습니다. 
물질의 발달과 더불어 마음의 불행 역시도 다층화되었습니다. 인간이 육체적으로 원하는 바를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지만 마음의 행복을 구현하기란 매우 어렵고 지속적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 음악, 향기, 맛난 음식, 육체적 관계들의 정점은 오늘의 ‘나’가 마음의 평안과 대비되는 것은 왜일까요?
그 이면에는 끊임없는 탐욕과 지속적인 불안 그리고 경쟁심이 내재되어있습니다. 명예와 권력으로는 해결책을 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때문에 과학과 의학의 발달과 더불어 몸과 마음의 상관성이 연구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행복에는 일시적인 행복과 궁극의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 바람직한 원인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지’로 인해 행복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합니다. 용수 보살은 “연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인과 연기와 가립 연기가 그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18년 2월 인도 다람살라에서 망명 티벳인들을 만나고 있는 달라이라마


현 70억 인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도덕적 삶’에 관심이 있을까요?
내가 살아가는 삶에서 만족하는 바에 의해 판단해 보십시오. 엄밀히 말해 마음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만족과 불만족 혹은 무관심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감정들을 색, 성, 향, 미, 촉이라고 하는 매우 세밀하고 견고한 욕망의 대상에 근거해 행복의 잣대로 삼습니다. 간단히 말해 종교를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모든 인류는 행복을 원하고 불행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면 세밀하게 마음을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뇌과학과 의학 분야에서 마음과의 상관성을 연구하는 것도 이러한 필요에 의한 것입니다. 
인간이 증상생인 것은 동물보다 사고와 지성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탄생이 단순하게 육체적 행복의 구현에만 있다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속적 윤리의 핵심은 ‘양심’입니다. 선한 마음,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양심에 비추어 사는 삶 그리고 행복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과 더불어 이웃과 진정한 벗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이 지닌 도덕이 그러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중심축이 됩니다. 근저에는 이성에 기반을 둔 지성적인 윤리와 사랑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용서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권유합니다. 저는 윤리와 이타가 인간의 삶에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해왔습니다. 종교를 지닌 이라면 더욱더 종교적인 실천과 수행이 어우러져야 합니다. 사랑, 자비, 인욕, 만족의 공통된 교리를 지닌 종교가 강조하는 바가 바로 용서와 계율입니다. 나와 남을 구별하고 나누는 것이 야기하는 많은 문제들을 직시하십시오. 
선한 마음을 삶에서 실천으로 구현하는 법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회봉사 활동이나 작은 것에 만족하는 삶이 그 예입니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아집’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붓다께서 ‘무상’과 ‘무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지닌 교리는 다르지만 추구하는 바는 상통합니다.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는 나 스스로가 ‘보호존’입니다. 나의 행복과 불행은 스스로 짓고 받은 것입니다. 행위, 다시 말해 ‘업’을 통해서 선과 불선이 지어집니다. 타인에게 도움이 됨을 본질로 한 것이 바로 선업입니다. 그 결과 나에게도 이득이 됩니다. 모두가 ‘나’에 의한 인과입니다. ‘나’는 오온에 의지하여 존재하며, 오온에 의지하지 않고 따로 존재하는 ‘나’란 없습니다. 
2500년 전에 출연한 불교, 비슷한 시기에 생겨난 자이나교를 비롯하여 다양한 외도들 역시 계, 정, 혜 삼학을 근본으로 삼아 대상을 분별하였습니다. 특별히 불교에서는 ‘일체법이 인과’라고 하였습니다. 외부의 현상과 기세간 그리고 유정세간이 모두 원인과 조건에 의해 존재한다는 견해입니다. 인과에 근거하여 ‘무아’로서 행복의 주체는 오온에 의지하여 ‘나’는 항상 변화합니다. 이 변화성을 외도에서는 영원불멸하는 실체라고 보았습니다. 때문에 궁극의 실체를 발견해야 한다는 오류에 빠졌습니다. 
나의 실체가 있다면 아집이 생겨납니다. 탐, 진, 번뇌의 원인이 바로 아집입니다. 나에 집착하는 아집은 악마와 같은 것이며 고통을 끌어오는 근원입니다. 붓다는 상일주재의 실체가 있다는 전도된 견해를 반박해 ‘무아’를 설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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