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장경 중간본 제주서 찍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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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장경 중간본 제주서 찍어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3.0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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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성보문화원이 지난 12월16일에 마련한 “한라산 영산재의 무형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이경화 문화재청 문화재감정관이 발표한‘제주도의 불교문화유산’가운데‘고려시대 제주 불교문화의 흥기’부분을 실었다. 여기에서는 이 문화재감정관은 불탑사 오층석탑과 존자암의 세존사리탑, 묘련사의 금강명경문구 등을 다루면서 고려시대의 제주 불교문화의 특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편집자주>
 

 

이경화 문화재청 문화재감정관이 종합토론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고려시대 제주에서 유물 및 문헌으로 확인되는 사찰은 법화사, 수정사, 존자암, 원당사, 묘련사, 보문사, 서천암, 강림사 등이다. 고려 충렬왕대(1275~1308)에 활동한 것으로 보는 혜일 스님은 법화사, 묘련사, 산방산 보문사, 서천암을 제재로 시를 남겼다. 고려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이제현(1287~1367)은 수정사에 대한 시를 썼다. 김상헌의 『남사록』(1601)에는 수정사가 원나라 황후가 소원을 빌기 위해 세워 원대의 불상이 있는 화려한 사찰이라 이해했고, 강림사 역시 원대에 세워진 사찰이라고 하였다. 관음사는 유구발굴에 의하면 고려 중기에 세워진 사찰이다. 유추되는 불상과 탑의 실물을 통해 법화사, 수정사, 원당사는 고려시대 제주 3대사찰로 꼽힌다. 
발굴을 통해 수정사지는 화려한 유물을 보여주었다. 눈여겨지는 유물이 23장의 점판암제 청석탑 부재이다. 그 중 초층 탑신석의 면석으로 추정되는 탑재에 인왕상이 문비의 좌우에 선각되어 있다. 청석탑은 석질이 물러 표면을 섬세하게 다듬을 수 있는 반면 완형이 잘 남아있지 않고 현재 30여기를 셈할 수 있다. 주로 고려 중기에 집중하여 만들어진 이형(異形) 석탑으로 벼루의 소재인 점판암이며 청록색, 청흑색이 많다. 청석탑의 일반화된 형태는 삼층의 지대석에 기단부 이상의 부재를 청석으로 하는 11층 이상의 다층탑이다. 기단은 상중하단의 3단 구성이되 상하대석에 각각 양련과 복련을 새긴다. 해인사 원당암 청석탑을 이와 유사한 기단 형태인 865년경 철원 도피안사삼층석탑과 연결하여 신라 9세기말의 예로 본다. 수정사지 청석탑의 문비 좌측 인왕상은 얼굴이 어깨 높이로 내려오고 오른발가락을 치켜 올려 전체적으로 탄력 있는 C자형 삼곡자세를 그린다. 인왕상은 발가락을 치켜 올려 바닥을 보이되 과도해 보이지는 않는다. 청석탑에서 인왕상이 새겨진 예로는 처음으로 확인된다. 탑의 흐름에서는 1079년경 금산사 청석탑보다 조금 후대로 본다. 직접적이지 않지만 수정사지 청석탑의 인왕상과 비교되는 상이 871년 황룡사지 사리외함 인왕상과 『불공견색신변진언경』(1275년) 등이 있다. 
법화사는 원나라가 탐라가 직할령으로 삼았던 시기에 중창한 사찰이다. 이곳에서는 고려와 몽고의 왕궁터에서 출토되는 운봉문, 용문의 막새기와를 비롯하여 양질의 청자편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고려 원종 10년(1269)에서 충렬왕 5년(1279)까지 중창을 마쳤다는 ‘至元六年己已始重井刱六年己卯畢’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후 1406년에 명 영락제가 사신을 보내어 법화사에 있는 원나라 양공이 조성한 금동아미타삼존불을 요구하여 옮겨갔다. 사신 황엄 일행이 아미타삼존불상과 부속 불구를 옮겨가며 만든 감실이 15개였다. 삼존과 광배를 담은 3개 감실 각각의 높이와 너비가 7척이었다. 한 변은  210㎝정도로 환산된다. 
고려시대 제주의 석조유물로써 현무암으로 만든 불탑사 오층석탑이 있다. 불탑사는 조선중기에 철폐된 원당사터에 안봉려관 스님이 1914년에 중건하였다. 원당사는 충렬왕 26년(1300년)에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불탑사 오층석탑은 높이 385㎝이며, 단층기단이고 기단저석과 괴임이 없다. 기단 중석은 1매로 되어있으며 희귀한 사례로써 후면을 제외하고 삼면에 방형의 액을 만들고 안상을 조식하였다. 안상 안에는 귀꽃이 음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탑신석은 사다리꼴로 위가 좁고 아래가 넓다. 탑신석의 체감률이 미약하고, 탑신괴임과 우주의 표현이 없다. 초층탑신석 남면에 감실을 표현하였다. 일반석탑에서는 대부분 상처마선만 들리는데 이 탑은 옥개석 상처마선과 하처마선이 같이 들린다. 그리고 옥개석 하면에는 층급받침이 없다. 현무암의 재질 때문에 층급받침을 나타내기 어려울 수 있으나 조각수법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층급받침이 없는 것은 고려후기 탑의 특징이다. 상단에 올려진 팔작지붕형 옥개석은 후보물이다. 이 탑과 같이 초층탑신석에 감실이 있고 탑신석 우주가 없는 탑은 고려후기 괴산 보안사 삼층석탑이다. 또한 봉화 운계리 폐탑은 초층탑신석에 감실이  있는 점, 탑신석에 우주가 없는 점, 옥개석 하면은 충급 받침이 없는 점, 체감률이 미미한 점에서 불탑사 오층석탑과 더 유사하다. 이에 따라 불탑사 오층석탑은 14세기 전반경의 고려후기 탑이다. 

“제주도의 불교문화유산”이라는 주제로 발표에 나선 이경화 문화재감정관이 불탑사 오층석탑에 대해 그 조성시기와 특성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 존자암지 세존사리탑이 제주도 현무암으로 만들어졌다. 구조는 지대석-기단석-탑신석-옥개석을 차례로 얹었다. 지대석과 기단석이 8각이며 기단석이 높은 편이다. 탑신석은 괴임돌에 사리공을 마련하여 끼웠다. 그 모양은 타원형 구에서 상하를 편형하게 치석하였다. 옥개석은 하면이 편평하며 처마가 두껍고 옥개석과 보주는 한 돌이다. 존자암은 17세기 전반 경에 한라산 영실에서 서쪽기슭을 벗어나 대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1651년에 제주안핵어사로 파견되었던 이경억의 시에 목격된 옛 존자암의 모습은 하나의 탑이 있는 쓸쓸한 절터였다. 다만 18세기 말 『증보탐라지』에 의하면 옛터에 불상 한 구와 섬돌과 기와조각이 있고 그 곁에는 돌항아리가 있다고 하였다. 뚜껑이 흔들거리지만 열기는 불가능하였는데 사람들이 시끄럽게 하면 그 항아리 속에서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일으켜 놀라 장난하는 사람들을 피해 연못으로 넣어버렸다는 전언을 기록하였다. 그 하나의 탑 혹은 돌항아리는 바로 사리탑일 가능성이 있다. 명문 없이 세존사리탑으로 불리는 이 탑은 일견 수계의식을 거행하는 통도사 금강계단과 연관되어 만들어지게 되었던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과 같이 석가사리를 봉안한 특별한 상징인 것으로도 보인다. 물론 설계(設戒)를 거행하는 단장이 아닐 것이다. 다만 고려말 조선초의 사리탑이 기단부가 화려하고 3단 대좌를 하는 경향과 달리 존자암 세존사리탑은 간략하고 기단석이 높으며 옥개석의 두께가 큰 점에서 시대는 더 하향되어 보인다. 
무엇보다 제주의 축적된 불교문화를 유추하게 하는 것은 1296년 제주 묘련사에서 거듭 판각한 『금광명경문구(金光明經文句)』이다. 1934년에 편집된 『曹溪山松廣寺史庫』에 ‘元貞二年丙寅歲高麗國濟州妙蓮社奉宣重彫 幹善瀑布寺住持禪師 安立’이라는 간기가 있다. 이 불전은 현재의 소재지는 불분명하지만 팔만대장경식 고려본이다. 1296년에 고려국 제주 묘련사가 조정에서 내려주신 책을 받들어서 제주도판을 다시 새겼다는 내용과 폭포사 주지 안립선사가 판각 작업을 총괄하였음을 밝혔다. 공교롭게 이 시기는 원 직할령(1273~1290)에서 고려로 환속된 시기이다. 다만 이후에도 고려 존속기간 동안 원의 병력이 유지되고 공마가 지속되어 고려와 원 이중귀속기로도 불린다.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13세기 말에 제주의 한 사찰이 국가의 지원을 받아 불경의 중간(重刊) 본을 만들 수 있는 체계를 갖추었다는 점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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