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금순 문학박사의 제주4.3항쟁과 제주불교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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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금순 문학박사의 제주4.3항쟁과 제주불교의 수난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4.04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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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항쟁기 제주불교의 수난은 제주 사회 현안에 깊숙이 참여하여 활동하였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승려들의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관음사 등 사찰들이 제주4․3항쟁의 격전지로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제주4․3항쟁으로 피해를 입은 제주불교 사찰은 37개소가 조사되어 있다. 이 중 사찰 건물의 피해는 35개소 인물 피해는 14개 사찰의 16명으로 조사되어 있다.

1. 제주불교 승려의 수난
피해 승려를 개인별로 살펴보자. 이일선은 1950년 예비검속 되어 산지 바다에 수장되었다. 
이일선은 선운사에서 출가 백양사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다 1937년 백양사 포교사로 제주에 내려온 이후 제주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 ‘제주불교연맹’ 포교부장으로 전도 순회강연을 주도하였으며,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 승려대회’의 준비위원장으로서 친일을 반성하여 왜색화 된 불교풍토를 정화하려는 노력을 주도하였다. 앞서 살핀 바처럼 1947년 ‘3․1절 기념 투쟁 제주도 위원회’ 선전동원부에서 활동하였으며,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3인의 의장단 중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력에도 1950년까지 활동하였던 것은 상좌인 김우송이 헌병장교로 그간 스님을 보호하였기 때문이라고 증언되고 있다. 
고인봉은 은수사 주지이다.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에서 ‘제주도불교청년단’ 단장으로 추대 되었다. 1950년 이일선이 예비검속으로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일본에서 승려 생활을 하다가 입적하였다. 
고정선은 수원사 주지이다.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의 교무회원, ‘제주도불교청년단’ 선전부원이었다. 1949년 봄,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였다. 당시 좌익 쪽 연락책이었다고 증언되는 고인봉이 수원사에 기거 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고문 끝에 고정선 스님은 총살당하였다. 

이세진은 내장사에서 출가하였다. 1932년 경성 개운사 불교 전문강원에서의 강연 기록이 남아있고 1937년 금강산 표훈사 중향강원의 강사였다. 1939년 한림포교당 포교사로 부임하면서 제주도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 ‘제주불교연맹’에서 교육부장으로서 학인을 교육한 강사이다. 1942년 도평리에 서관음사를 창건하여 기와공장을 운영하며 강원설립을 계획하는 등으로 불교의 경제적 자립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1948년 입산하여 무장대로 활동하였다. 무장대 지휘부였던 이덕구 등 15인과 함께 관음사에서 기거하며 활동하였다고 증언된다. 1949년 초, 토벌대에 포로로 잡혀 제주시 동부두 주정공장에 잡혀있었으나, 이일선의 상좌였던 헌병장교 김우송의 도움으로 목숨을 유지한다. 그러나 1949년 7월 관음사에서 다시 잡혀가 산지 앞바다에 수장 당하였다. 
고제선은 서관음사 승려로 이세진의 상좌이다. 대각사 서기를 역임하였고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에 서관음사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토벌대의 서관음사 소각 후 행방불명되었다. 
원문상은 기림사에서 출가하였다. 법화사에서 활동하였으며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의 부의장으로 승려대회를 진행하였고 중앙교무회에 파견될 제주대의원으로 추대되었다. 중문중학원을 설립하고 여기에서 역사와 국어, 한문을 가르쳤다. 1950년 7월 7일 서귀포 경찰서장 김호겸의 이름으로 제주도 경찰국장에게 보고한 문서인 ‘공무원 구속자 명부’에 의하면 원문상은 2․7사건의 주모자이고 좌익사상 극렬자로 기록되어 있다. 증언으로는 서북청년단으로 내려온 전문규가 누명을 씌워 학교를 빼앗았고 이후 예비검속 되었고 섯알오름 집단학살에서 처형당하였다고 한다. 이창현은 1950년 9월 4일 제주경찰서 예비검속자 명단에 있다. 이창현은 검속 당시 직업이 승려로 기재되어 있다. 남로당원, 농위원이 범죄개요로 기록되어 있다. 범죄개요를 봤을 때 예비검속자들과 함께 희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이화는 관음사에서 출가하여 관음사 서기, 제주불교포교당 서기, 법화사와 불탑사 감원, 포교당 감원, 관음사 2대주지, 제주교구 교무원 재무국장, 조선불교 중앙대의원, 제주교구 교무원장, 1939년 제주불교연맹 활동을 주도하는 등으로 제주불교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제주4․3항쟁기 무장대의 활동무대로 활용되던 관음사의 주지였다. 1949년 2월 관음사전투의 격전지로 토벌대와 무장대의 전투 결과 토벌대에 의해 관음사가 불태워졌다. 당시 토벌대는 관음사 주지 오이화를 마차에 묶어 고문을 하였다고 증언되고 있으며, 1950년 고문 후유증으로 앓다 사망하였다.
이성봉은 화엄사 제주포교소 포교사로 1937년 두 달에 걸친 법화산림 대작불사를 마련하여 제주도 순회포교를 실시하였다. 1939년 ‘제주불교연맹’에서 검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에서 교무회원으로 선정되었다. 1949년 10월 금붕사 경내에서 총살당하였다. 이성봉은 금붕사 경내로 도망 온 마을주민을 숨겨주고 있었는데, 마을 청년을 뒤따라온 토벌대가 청년의 행방을 물었으나 스님이 모른다고 하자 여덟 발의 총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백인수는 용장사 승려로 1940년 백양사 김녕포교소 감원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에서 교무회원, ‘제주불교청년단’ 선전부장으로 추대되었다. 백인수는 1949년 1월 6일 토벌대의 도평마을 집단 학살로 희생되었다. 신홍연은 함덕리 백양사 포교소를 창건하였다. 함덕리 마을 청년들이 토벌대를 피해 절에 숨어 생활하는 것이 발각되어 귤나무에 묶인 채 살해되었다. 군인들이 마을 청년들에게 죽창을 들고 스님을 찌르게 하였다. 가부좌를 하고 염불을 하며 임종했는데 가부좌 상태로 굳어 있어서 시신을 펼 수가 없는 지경의 것을 상좌 김두전의 기도로 몸을 풀어 매장할 수 있었다고 증언된다.
양홍기는 원만암 승려로 1945년 ‘제주도불교청년단’ 단원이었다. 홀로 절을 지키다 토벌대에게 총살당하였다.
강기규는 단산사 승려이다. 1945년 ‘제주도불교청년단’ 선전부원이었다. 1948년 가을, 소개 되던 때 단산사 경내에서 토벌대에 총살당하였다.
김덕수는 월정사 승려이다. 입산하여 무장대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김석윤 스님의 일기에 의하면 김덕수 스님은 1948년 11월 13일 월정사에서 잡혀나가 제주시 박성내에서 총살당하였다.
김유신은 북촌포교소 주지이다. 북촌리 집단학살 당시인 1949년 1월 17일 마을주민 400여명과 함께 총살당하였다. 북촌리 집단학살은 제주4.3항쟁으로 가장 피해가 컸을 뿐 아니라 잔인하였다. 
1948년 가을 애월리 보광사에 무장대가 다녀갔는지 여부를 조사하던 토벌대에게 보광사 경내에서 승려가 총살당하였다. 지금은 그 승려의 성명을 기억하는 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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