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 존재 모두가 다 본래 성품이 자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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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존재 모두가 다 본래 성품이 자성입니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5.1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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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큰 스님

불기 2562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우리 본래면목인 자성청정심을 찾는 것이 우리들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라는 청화 큰 스님의 법문을 실었습니다. 스님은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보면 속물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속물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본성이고 그러한 길로 가는 것이 본래의 고향으로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편집자주>

청화 큰 스님 1947년 세납 25세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금타 화상을 은사로 득도. 출가 이후 40여년 동안 사성암 벽송사 백장암 상견성암 상원암 남미륵암 칠장사 등을 거치며 수행정진하심. 1985년 전남 곡성군 죽곡면에 소재한 동리산 태안사에서 삼년결사를 시작으로 회상을 이루시고 대중교화의 인연을 지음심. 1995년까지 한국전쟁으로 화마를 입었던 태안사를 중창복원하여 구산선문 중 하나인 동리산문을 재건하심. 미주포교를 위해 카멜 삼보사, 팜스프링 금강선원 등을 건립하시고 삼년결사를 수행하심. 성륜사 조실, 조계종 원로위원 역임. 2003년 11월12일 열반.

 

부처님 법은 법왕법法王法입니다. 법왕이란 바로 진리의 왕입니다. 따라서 세계 여러 가지 종교가 자기 나름대로 진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만, 모든 진리가 다 법왕법에 귀속이 됩니다. 그 법은 그냥 상대 유한적인 법이 아니라, 이른바 절대적인 모든 것을 그 속에 포괄하는 그런 법입니다. 
부처님 법은 모든 철학 체계 및 다른 성자의 종교철학적 교설도 다 담고 있고 포괄하고 있습니다. 포괄함과 동시에 더 나아가 초월해 있는 법 중의 법입니다. 그래서 법왕법인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 곧 법왕법은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이른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법입니다. 무시무종이라, 남(生)도 없고 죽음(死)도 없습니다. 이른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내 몸뚱이도 분명히 한계가 있고 세계도 한계가 있는 것인데, 어째서 그런 법이 한계가 없고 시간적으로 보나 공간적으로 보나 그야말로 무가정無假定의 원리일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품습니다. 
중생이 대상을 분할해서 보고 나누어서 보기 때문이고 또한 중생이 무명심으로 중생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지 무명심을 떠나 버리면 모두가 하나요, 하나의 진리입니다. 우리 중생이 괴로움을 느끼고 인생고를 느끼며 시달리는 것은 중생이 진리를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진리의 왕인 부처님 법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괴로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째서 괴로움이 없는가 하면, 괴로워하는 자기 주체도 본래는 허망한 것이란 말입니다. 괴로워하는 자기 주체도 하나의 환상인 것이지, 실존적이고 실재적인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다른 일체 만유도 모두 다 마찬가지입니다. (……) 불경에 제고무명고諸苦無明故라, 인생고가 무명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인생고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무명 때문에 잘못 보아서 있습니다. 따라서 무명의 반대가, 무명의 반대인 동시에 무명의 본체가, 바로 진여眞如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무명과 진리는 대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가현각 대사의 증도가에도 있는 법문입니다만 무명의 실상이 바로 진여불성입니다. 무명이 따로 있고, 즉 어리석음이라는 무명이 따로 있고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참으로 있는 것은 결국 진여불성뿐입니다. 우리 중생이 자업자득으로 스스로 분별시비하기 때문에 무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명도 궁극적으로 따지고 보면 진여 위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허상에 불과합니다. 허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성불할 때까지는 사뭇 놓치지 않고서 공부를 해야 되겠지만, 우리 중생은 모양 세계에 놓여 있습니다. 모양 세계란 것은 그때그때 구분이 있고 한계가 있습니다. 하루에 세 때 먹어야 되고 갈 곳은 가야되듯이, 모양에 따른 한계가 있어서 쉴 때도 필요하고, 푸는 제도나 맺는 제도도 있고, 처음과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에는 무간수행이라, 사이가 없이 공부를 해야 번뇌의 침해을 받지 않습니다. 공부를 했다 안 했다 하면, 우리 중생의 본래 뿌리는 진리일망정, 우리가 무명무지 가운데 있고, 과거 전생의 숙업도 많이 짓고 금생에도 학교에서 잘못 배워서 사회의 모순 상황에서 오염을 많이 받습니다. 그 때문에 중생은 범부 때는 하나의 속물입니다. 속물이란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 속물입니다. 제법이 공한 것인 줄 모르는 것은, 사실은 중생이 속물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법으로 생각할 때, 오온화합, 오온이 가화합假和合한 것이 내 몸이요, 내 정신입니다. 즉 지수화풍, 사대인 물질적 요소와 수상행식인 정신적 요소, 그것이 오온 아닙니까? 우리 몸이나 물질적인 모든 현상은 다 오온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우리 중생들에게 보이는 것은 오온 차원밖에 안 보입니다. 따라서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오온 세계입니다. 
오온 세계는 실상적인 세계가 아닙니다. 오온이 사실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중생은 범부, 다시 말해 속물인 것이고, 속물주의의 속물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눈에 보이는 대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속물이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참 저 놈은 속물이구나. 속기를 떠나지 못했다.” 하는 말처럼 물질에 얽매이지 않아야 무위의 세계, 안락스러운 세계, 훤히 트인 마음을 가진 것인데, 우리 눈에 보이는 곧이곧대로 그대로 있다고 한다면, 속물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공부는 모든 존재의 근원 자리, 즉 오온개공의 자리, 오온이 다 비어 있는 자리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공부할 때 분명히 눈으로 봤을 때 있는 것인데, 이는 있는 그대로를 다 비었다고 하니까 성가신 일이 아닙니까? 그것도 과학적으로 분석해 본 다음에 빈 것이란 뜻이 아니라, 오온즉공입니다. 바로 이대로 오온이 그대로 공이라니 얼른 이해하겠습니까? 아니 내 몸뚱이가 이렇게 꼬집어 뜯으면 아픈데, 이대로 비었다 하면 곧이 듣겠습니까? 물론 이대로 빈 것이 사실입니다. 당체즉공當體卽空이라, 당체즉공이란 말은 지금 보이는 이 몸이 그대로 비었다는 소식입니다. 
금강경이나 반야심경 도리는 다 당체즉공입니다. 존재 자체가 비어 있다는 그런 소식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체즉공의 공이란 것은 이론적으로만 생각하면 허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이론의 토대 위에서 공부해 가지고, 즉 기도도 많이 모시고 참선도 오랫동안 해서 이른바 삼매에 들어가면, 그 때는 그 공의 알맹이를 우리가 체험하게 됩니다. 
공의 알맹이, 공의 당체는 공이 아니라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진공묘유란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자리가 바로 불성 자리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자성입니다. 
육조단경에서 자성이라는 말이 몇 군데가 있는가 하고 한 번 헤아려 보니까 일백 군데가 넘어요. 우리 중생들이 모두가 다 자성에 귀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성은 바로 불성인데 다시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 우리 인간의 본래면목이 바로 자성이고 자성청정심입니다. 또한 우주의 본래 성품이 바로 자성입니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체 존재 모두가 다 본래 성품이 자성입니다. 자성은 바로 불성인데 진여불성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의 본래면목을 모르고서 함부로 망동하지 말고 본래의 자리 곧 자성 자리로 귀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염불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염불은 부처를 생각한단 말입니다. 부처가 무엇인지? 부처가 바로 자기 자성입니다. 화두는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무엇을 의심하는 것인가? 내 자성은 무엇인가? 내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내 본분소식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 자리를 의심하고 참구해서 그 자리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쉽다고 하면 가장 쉬운 것이 불법이고, 불법 가운데서도 가장 쉽고 간단명료한 것이, 분명 명석한 것이 참선법입니다. 보통 공부하는 법은 뱅뱅 돌아가서 점차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선법이란 아주 대승법입니다. 
대승법이란 그렇게 뱅뱅 돌아서 우회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직통으로 바로 갑니다. 검으면 검다 하고 희면 희다 하고, 천지 우주가 다 부처님 진여불성 법인 것이고 그 외는 다른 것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과거 숙세로부터 많이 닦아서 업장이 가볍고 금생에도 좋은 인연 만나서 바로 공부한 분들은, 정말로 공부하기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없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갖추고 있는 것을 못 느끼고 있다가, 바로 본 사람이 그대로 말만 해 주면 그것이 직통으로 통한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당하當下에 활연대오豁然大悟라, 말 한 마디에 그 자리에서 바로 크게 깨달아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인간성의 본래면목, 우주의 근본 자리, 영원히 죽지 않는 자리, 불생불멸한 그 자리, 영원한 해탈 자리, 그 자리로 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 가운데서 최상의, 제일의第一義적인 법입니다. 그러기에 참선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젊은 청춘을 다 그만두고 평생 동안 걸망지고 오락가락하면서 공부를 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집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연 따라서 부부가 되고 한 가족이 되고 그러지만, 종당에 가서는 누구나 다 참다운 수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생을 받고 금생에 산 보람이 무엇이냐 하면, 오직 본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몇 생을 헤맨다 하더라도 영원한 해탈 자리에 돌아가고야 마는 것이 우리 중생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자기 고향 자리, 생명의 근원 자리로 기왕이면 빨리 가는 것이 모든 존재의 의무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길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고향으로 가는 길, 자기 생명으로 가는 길은 사실은 제일 쉬운 길입니다. 우주의 도리대로 가는 길입니다. 봄이 오면 여름이 멀지 않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그렇게 오듯이, 공부하는 것도 역시 우리가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가 되고야 만다는 말입니다. 안 되고 버틴다고 배기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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