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법문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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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법문 (48)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5.30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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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③ : 팔정도가 중도이다

부처님 최초의 설법인 「초전법륜경」(S56:11)에서 보듯 중도는 팔정도이다. 37보리분법 전체를 중도의 내용으로 나타내고 있는 「나체수행자 경 1, 2」(A3:151∼152)를 제외한 모든 초기불전에서 중도는 반드시 팔정도로 설명되고 있으며, 반야중관 학파의 기본 가르침인 『중론』에서 말하는 팔불중도(八不中道)나 공가중(空暇中)의 중(中)을 중도라고 하지 않는다. 

  대승불교에서 중도의 개념이 혼란스럽게 된 출발점은 『중론』이라 할 수 있다. 『중론』은 공가중(空暇中) 삼관(三觀)의 중(中)을 중도라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중은 단순히 중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일이(一異)·거래(去來)·유무(有無)·단상(斷常)의 양 극단을 여윈 것을 중도라는 술어를 사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연기(緣起)이기에 공(空)이고, 이것을 중도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용수 스님의 논의의 토대가 되는 「깟짜야나 곳따 경」(S12:15)에서 보면 ‘있다(atthi, 有), 없다(natthi, 無)는 단정적인 견해로 이 세상을 파악하지 말고 ‘일어남(samudaya, 起)과 사라짐(norodha, 滅)’이라는 연기적 사유로 세상을 꿰뚫어 보라고 설하고 있다. 이 경에서 보면 여래는 ‘있다, 없다’는 양 극단을 따르지 않고 중(majjha, 中)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고 나와 있다.
  이 경에서 중요한 것은 유무를 여윈 것을 ‘중’의 견해라고 말하지 ‘중도’라고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특히 『중론』의 삼제게(三諸偈)는 연기적 현상을 공가중(空暇中)으로 통찰하는 것을 중도라고 설파하고 있기 때문에 『중론』에서 말하는 중도는 연기에 대한 통찰지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을 말하는 것이지 실천도로서의 팔정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달리 초기불전에서 뜻하는 중도는 철학이나 견해가 아니라 실천이다. 중(中)의 의미를 철학적 사유에 터 잡아 설명하면 실천 체계로서의 중도를 관념적으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크다. ‘중’은 연기요, ‘중도’는 다름 아닌 팔정도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중(majjha, 中)에 도 닦음(patipadā)이 붙으면 중도가 되며, 중도는 연기적 사유나 관찰이나 통찰을 도 닦음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도는 연기의 통찰에 기초한 바른 도 닦음, 즉 바른 견해·바른 사유·바른 말·바른 행위·바른 생계·바른 정진·바른 마음챙김·바른 삼매라는 여덟 가지 바른 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 실천은 초기불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바로 지금 여기에 충실함이다. 중도는 연기를 지금 여기에서 여실지견(如實知見)하여 매 찰나 올바름을 행하는 실천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가 한국에 급속히 뿌리내리면서 중도는 팔정도라고 인정하는 분들이 점차 많아지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초기불교는 불교의 뿌리이다. 이제는 중도를 유무중도나 고락중도나 팔불중도 등의 견해나 철학으로 보지 말고 부처님께서 고구정녕히 말씀하신 팔정도라는 실천 체계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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