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을 관통한 총탄은 금붕사를 붉게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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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을 관통한 총탄은 금붕사를 붉게 물들였다
  • 특별취재팀
  • 승인 2018.08.0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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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70주년 맞아 제주불교 4.3흔적 바로 세우기<2>-구좌읍 하도리‘금붕사’

제주4.3 당시 불교의 수난은 제주 사회 현안에 깊숙이 참여했기 때문에 그 피해도 컸다. 승려들의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관음사 등 사찰들이 제주4.3의 격전지로 수난을 당했다. 
이에 본지는 제주4.3으로 피해를 입은 40여 사찰은 물론 16명의 순교한 스님들의 업적을 재조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4.3 당시 불교의 역할과 수난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4.3의 정의로운 해결에 첫 디딤돌을 놓고자 한다. <편집자주>

 

금붕사 창건주 이성봉 스님은 1949년 음력 10월 21일 토벌대에 의해 금붕사 옛 입구에서 총살을 당해 생을 마감한다. 손주인 수암 스님이 그 현장을 증언하고 있다.

 

성봉스님, 목동 숨겨줬다 사상의심자로 몰려 총살
 수암스님,“금붕사 후세 위한 평화교육현장 되길”

 

구좌읍 하도리 금붕사 창건주 이성봉 스님은 1948년 4․3이 발발한 후 고향인 하도리 창흥동으로 피신하게 된다. 낮에는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저녁에는 속가인 창흥동으로 내려간 것이다. 
겨울로 접어 들 무렵, 1948년 음력 10월 21일 스님은 법당에서 사시예불을 드리는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쫓아 뛰쳐나갔던 스님의 눈앞에 목동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그 뒤로 총을 든 군인들이 헐레벌떡 뒤쫓아 왔고 숨을 들이킬 사이도 없이 군인들은 스님에게 “이 앞을 지나간 목동을 못 봤냐”고 다짜고짜 물었다.
이에 스님은 “모른다”고 말하자 그들은 사상이 의심된다고 곧바로 스님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그리고는 6방의 총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래도 생명이 끊어지지 않자 군인들은 망설임 없이 바로 방아쇠를 스님의 심장 쪽으로 잡아당겼다. “타당!” 소리와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금

이성봉 스님의 비석.

붕사 도량을 붉게 물들였다. 군인들은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양철집인 대웅전과 스님이 기거했던 초가 요사채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초가집은 불을 지르자 금세 타올랐고, 다행히도 대웅전은 삼분의 일만 타다 남았다. 그러나 스님이 흙으로 빚어 직접 만든 나한상 등은 불에 그슬려 손만 닿아도 부스러졌다. 
군인들이 무서워 제때 시신은 수습하지 못하던 시절이다. 겨우 군인들이 돌아가자 식구들은 스님의 총탄 구멍에 좌복의 솜을 떼어다 그 안을 막았다. 총탄에 온 몸이 벌집이 되어 버린 스님의 시신을 수레에 실었다. 이성봉 스님의 고향인 행원의 가족묘지에 봉안한다. 가족들은 이 같은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다시는 없기를 바라며 스님이 아미타부처님 품안에서 극락왕생을 발원했다.
“어린 시절인데도 어머니와 이모님이 대성통곡하는 소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40년 생으로 이성봉 스님의 외손자인 수암 스님(현 금붕사 주지)이 할머니로부터 들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이처럼 토해냈다. 당시 스님은 부모님을 따라 전남 여수에서 지낼 무렵이었기 때문에 4․3의 광풍에 온전할 수 있었다.  
이성봉 스님이 돌아가시면서 금붕사는 수암 스님의 어머니와 이모, 스님까지 4대째 이어오고 있다. 이성봉 스님은 16나한을 흙으로 직접 만들어서 법당에 봉안할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 그리고 스님이 손때가 묻어 전해지는 ‘오백나한 탱화’는 다행히도 현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이 탱화는 화엄사에서 수행했던 이성봉 스님이 1925년 제주에 내려오면서 함께 가지고 온 것이란다. 그러나 아쉽게도 탱화의 제작연대와 작가는 모두 지워져 있다.
수암 스님은 금붕사나유타합창단을 통해 금붕사가 4․3당시 폐허로 변해버린 당시의 애절함함과 이성봉 스님의 가슴 맺힌 한을 풀어내는 공연을 기획하며 금붕사의 4․3피해 사실을 문화예술적으로 승화해내기도 했다. 

이성봉 스님이 1925년 화엄사에서 갖고 내려온 오백나한 탱화로 4.3때 소실되지 않아 현재 대웅전애 봉안돼 있다.


수암 스님은 “금붕사가 4․3의 비극을 기억하면서 다시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후세들을 위한 평화교육현장이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하며 “스님을 기억하는 추모비를 세우는 등 노력들을 기울여 나가겠다”고 밝혔다.

 

 

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4.3-금붕사

금붕사는 구좌읍 하도리에 있다. 1926년 이성봉 스님이 창건하였고 1928년 화엄사포교소로 신고했다. 1936년에는 미신을 타파하고 불교의 근본정신을 되살리자는 취지로 법화산림 대작불사를 마련하여 최청산, 김신산, 이학암, 문학연 스님과 함께 제주도 순회강연을 펼쳤다. 1948년 금붕사는 제주4․3으로 이성봉 스님이 군인에게 총살당하였고 요사채는 전소되었고 법당 일부가 소각되었다. 1950년부터 복구되기 시작하여 1978년에 대웅전을 중건했다. 
1948년 10월 17일 송요찬 9연대장은 제주 해안에서 5㎞ 이상 지역에 통행금지를 명령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이를 어길 때에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금붕사도 해안가 마을 인가와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창흥동 마을에 방을 빌려 소개하고 있으면서 낮에는 절에 와서 예불을 보고 밤에는 창흥동 마을 집으로 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48년 11월에 들어 토벌대는 구좌면 행원리 주민 10여명을 총살하고 20여 채 가옥을 방화하였고, 남원면 의귀리, 수망리, 한남리의 주민을 총살하고 가옥 대부분을 방화하였다. 애월면 하가리에서도 25명의 주민을 총살하고 방화, 소길리에서는 주민 5~60명을 집단 총살하는 등으로 초토화작전을 벌였다. 9연대장의 적극적이고 강력한 활동은 제주도민의 무차별 학살이었다.
그리고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금붕사의 이성봉 스님은 바로 이 시기 계엄령 등에 힘입어 기세등등해진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계엄령 선포 후 일주일 사이인 “11월 20일부터 27일 사이에 폭도 122명 생포, 576명 사살했다”고 9연대장이 미군 임시 군사고문단에 보고한 것으로도 계엄령으로 적극적인 작전을 수행하였음을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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