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불자로 가는 길 / 고순환 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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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불자로 가는 길 / 고순환 불자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8.08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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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신행수기 공모 우수작

이번 주에는 제 4회 신행수기는 공모에 우수작으로는 뽑힌 고순환 불자의 “참불자로 가는 길”을 실었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어릴 적, 아들이 단명할까 노심초사 백일기도를 올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우리 불교 전반에 대한 생각을 자연스럽게 펼쳐놓고 있다. <편집자주>

 

남들이 곤하게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에 어머님은 나를 흔들어 깨우신다. 불공 시간이 다 되어가니 서둘러 절간으로 가야한다고, 그때 겨우 국민학교 지금의 초등학교 이학년인 나로서는 절집으로 가는 게 죽기보다도 싫었다. 
여기저기 도깨비 방망이든 무서운 귀신 그림들이 온 벽면을 차지하고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만 같은 공포감에 정말이지 절간 근처에도 가기조차 싫었다. 
한참을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고 난 후에야 끌려가다시피 그 무서운 절집으로 향한다. 이 꼭두새벽에 나를 데리고 가는 이유가 궁금하여 어머님께 여쭈어 보았다. 
아들, 너는 명줄이 짧다고 하여 칠성에 공을 들여야 한다고 적어도 백일 동안은 매일 새벽에 절에 가서 칠성단에 불공을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사형선고다. 그것도 백일 동안이나 그 무서운 곳에서 불공을 드려야 한다니 어안이 벙벙하다. 
어머님이 말씀하셨던 그 칠성단, 도대체 칠성단에는 어떤 무엇이 있기에 나의 명줄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가라고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공을 드리는 내내 어머님 따라 절을 하면서도 무서워서 그게 칠성단 쪽으로 자꾸 시선이 간다. 아! 저 이상하게 생긴 저 사람들이구나. 
나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 사람들이 저기 그려져 있는 저 사람들이라니 자꾸만 이상한 생각으로 제 정신이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가 무엇이며 보살이 뭔지도 알지 못하는 나에게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탱화)은 그저 생소할 뿐이다. 
무서움이 전부라고나 할까, 자꾸 불편해 하는 나에게 어머님은 그저 열심히 절만하라고 하신다. 앞에 부처님만 보면서 열심히 절만 하라고 그래야 부처님이 복을 줘 오래 명줄이 이어진다고.
어머님이 그렇게 하시는 건 그만한 사연이 있다. 우리 집안은 유독 남자들이 단명했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일학년 때 외아들인 아버님도 33세의 젊디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집안 통틀어 중년남자가 두세 분에 불과하였으니 명이 짧은 집안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아들이 명줄을 이어 주려고 어머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성으로 그렇게 칠성단에 공을 들이셨나보다. 
어머님의 지극 정성으로 공들인 불심 덕일까. 아니면 벽면에 그려져 있던 그 무서운 사람들의 신통력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 건강하게 숨을 쉬게 하고 여기저기 부처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원 없이 유랑의 길을 가곤 했으니 이만하면 칠성단의 공덕을 단단히 받은 셈이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불자로서의 진정한 믿음이 필요한 거다. 내가 진정한 불자라는 믿음과 적어도 보살은 되지 못할망정 보살을 닮으려는 노력이 더해질 때 우리 불교의 미래도 서광이 비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믿음이란 무조건적이지 않은 본인 스스로 믿음에 대한 청결함과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성깔도 지녀야 된다고 보아진다. 
믿음과 불심은 꼭 같은 한길을 가기 때문이다. 아무리 진득한 믿음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불심이 모자라면 결국은 흔들릴 수 있으므로 불자라면 한번쯤 자기 자신을 냉철하게 뒤돌아보는 아량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흔하디흔한 다 종교 틈바구니에서 불교가 살아남을 길은 딱 한가지뿐이다.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신뢰와 진정한 믿음이라고. 그냥 보여주기식 믿음이 아닌 부모가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여 드리는 불공만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가식없는 진실이 함께 할 때 불자가 아닌 지인에게도 불교를 권하고 같은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불교는 이상한 취약점을 갖고 있다. 
우선 가까운 직계 가족들에게도 불교를 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공이라도 있어 절에 가보면 대부분이 나이 많으신 보살님뿐이다. 
할아버지 아들 딸 며느리 손자들은 몽땅 저당 잡히고 보살님 혼자만 오신다. 
다른 교는 주일 예배라도 있을라치면 집안 식구 우르르 다 몰려간다. 우리는 왜 그렇게 못하는 것일까. 이게 우리 불교계가 풀어야할 큰 과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릴 적 무서우면서도 어머님 손에 이끌려 절에 가기 시작한 게 오늘날 불교에 쉽게 발을 내디딜 수 있었던 시발점이 되었듯이 우리 식구들에게 먼저 부처님과 친숙할 수 있도록 하는 조그만 이벤트라도 자주 만들어 어려워하는 식구들에게 첫 발걸음을 쉽게 띌 수 있게 하는 운영자분들이 아이디어가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든다. 
우리 집 애들도 처름엔 절에 가서 법당 안으로 들어가는 걸 무척이나 어려워했다. 
그래도 기회 있을 때마다 자꾸 데릭 가서 향공양도 시키도 초공양도 시키고 법당 청소도 시키다 보니 지금은 법당이 제네들 세상이다. 
불공이라도 있는 날이면 이것저것 잔심부름은 도맡아 한다. 일요일엔 온갖 친구들도 다 불러 모아 절집이 지들이 놀이터인양 시끌벅적하다. 
세월이 흘러 2~30년 후 지금의 절집을 지켜주시는 노보살님들이 영면하시고 나면 그 뒤를 이을 지금의 젊은이들이 옛날의 노보살님들 만큼이나 절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지금의 추세로 봐서는 영 답이 안 나온다. 그래서 걱정스럽다. 
얼마 전에 있었던 부처님오신날에는 어느 절이고 많은 이들이 절집을 찾았다. 평소에 불교와 관계없는 사람들도 이날은 절을 찾는 이들도 많다. 여기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한 가지 답이 나온다. 지금의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우리와 같은 길을 가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표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저 중에 몇 분이라도 불교를 이해시키고 부처님 제자로서 아름다운 믿음의 길을 함께할 수 있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특히나 부처님오신날 절집을 찾은 어린 꼬마 손님들에게 관심을 가져볼 필요성을 느낀다. 보통은 삼배나 하고 꼬마 손님을 위해 마련한 염주 같은 조그만 선물을 주는 게 보통의 일반적인 예일 것이다. 
이것만으로 꼬마 손님들이 차후에 불교를 이끌어 나갈 주역들로 커주기를 바란다는 건 많이 모자라 보인다. 
뭔가 동심이 세계에서 부처님을 마음속에 심어줄 수 있는 아니, 어른으로 성장했어도 그때 그날 부처님 오신 날에 있었던 아름다운 추억거리를 잊지 않게 하는 마음의 부처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된다. 
조금만 생각하고 뒤를 돌아본다면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십여 년 전 일이다.
종교의 ‘종’자에도 관심이 없는 친한 벗이 있다. 어릴 적부터 이웃에다 형제나 다름없이 지내온 터라 자질구레한 일까지도 스스럼없이 물어보곤 하는 친구다. 
어느 날 이 친구가 “친구야, 우리 사돈댁이 돌아가셔서 49재를 하는데 딸의 아버지로서 나는 어떻게 해야 되지?”라고 묻는다. 그래 이것저것 생각할 게 뭐 있어, 가서 절도 하고 법문도 듣고 딸 체면도 세워주고 오면 되는 거지라고 지나가는 말로 대강 얼버무리고 말았다. 
어느 종교에도 관심 없는 친구에게 많은 얘기를 해본들 소귀에 경 읽기나 진배없는 걸 알고 있기에 친구의 물음에 대답해줄 말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친구가 마누라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딸애의 체면도 있어서 사돈댁의 49재에 다녀왔다는 것이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다음날 부러 나를 찾아와서는 “야, 부처님은 있냐? 사십구재는 왜 하는 거냐?” 등등 귀찮을 만큼이나 이것저것 물어본다. 
사실 많이 황당했다. 
그러나 기회이기도 했다. 
내가 아는 불교의 모든 것을 그 황당한 친구에게 몇 시간이나 설명하고 내가 다녀본 인도 미얀마 네팔 티베트 부탄 등등 불교의 나라들에 관한 얘기며 사진들을 보여 주었더니 “야, 이 사람들이 정말 진정한 불자네.”라고 한다. 
추운 겨울날 티베트의 한 불자가 일보일배하는 사진을 보여 주었더니 하는 말이다. 
“그래, 이 사람은 진정으로 생전에 자기가 지은 죄를 참회하는 거라.”고 했더니 가슴이 짠하단다. 
그렇다. 아무리 종교에 관심이 없고 목석같은 사람일지라도 우리 인간의 내면에서 느끼는 아름다운 감정은 둘이 아니고 분명 꼭 같은 하나라고 믿어진다. 
훗날 이 친구는 서너 명의 지인들을 대동하고 어느 불교대학에서 본인이 얻고자 하는 마음의 양식을 넉넉히 쌓았으리라 짐작되어진다. 이제는 포교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니 말문이 막힌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조그만 인연 하나만으로도 많은 걸 나누어줄 수 있는 부처님의 철학에 무한한 감동을 느껴본다. 
우리는 동일한 하나의 생명체로서 윤회사상을 중시하는 불교에서의 인연이란 아름다운 진정한 믿음이라고 자신하고 싶다. 
그 아름다운 믿음이 함께할 때 불교의 앞날도 어둡지 않음을 되새기며 그 황당했던 친구의 포교사 시험도 부처님의 넉넉한 가피와 함께 꼭 이루어지기를 부처님을 향해 쌍수모아 간곡히 염을 해본다. 
나무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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