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 도솔산 선운사(禪雲寺)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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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 도솔산 선운사(禪雲寺) (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8.0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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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67)
추사 김정희가 타개하기 1년 전에 쓴 화엄종주백파대율사(華嚴宗主白坡大律師) 대기대용지비(大機大用之碑)

 

선운사 <사적기>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절이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당시의 유물이나 신뢰할 만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 전하는 기록 중 이른 시기의 것으로는 조선시대 초기에 편찬된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고려 중기의 문신인 김극기(金克己, 1170-1197)가 선운사를 노래한 시를 들 수 있다. 또한 고려를 대표하는 문인인 이규보(李奎報)가 선운사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우왕(1374-1388) 때 윤진(尹珍)이라는 이 지역 출신 문인이 쓴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옛 길이 숲 사이에 뚫렸는데 돌은 험하고, 겹친 산이 절을 싸안고 물은 맴도는구나. 양쪽 벼랑에 나무 빽빽한데 평상에 바람 이니, 시냇가 누각에 잠깐 올라 한바탕 웃네. (<신증 동국여지승람>)

이처럼 고려시대에 선운사의 상황을 알리는 기록이 남아 있고, 대웅보전 앞의 석탑, 돌계단, 석등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관음전의 금동지장보살상(보물 제279호)은 14세기 중창 불사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보면 고려시대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전기인 1470년에는 행호(幸浩)선사에 의해 선운사에서 대대적인 중창 불사가 이루어졌다. <사적기> 기록에 의하면 이즈음에 행호선사가 도솔산의 다른 사찰에서 열린 수륙재에 참여했다가 석탑만 남은 황폐한 선운사터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꿈에서 산신이 폐사를 중창해달라고 간절하게 청해 중창을 결심했다고 한다. 고려시대 말기 윤진인 쓴 시와 행호선사의 기록을 연결해서 보면 약 90년 정도 되는 기간 사이 어느 때인가 선운사가 폐허가 되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아마도 고려시대 말기에 서해안 곳곳을 노략질한 왜구들과 연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행호선사는 덕원군(德源君) 등 왕실과 관청의 후원을 받아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이루었는데, 이후 선운사는 도솔산의 다른 사찰들을 제치고 대표적인 사찰로 자리매김하였다.
임진왜란 때 선운사는 다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수십 년에 걸쳐 조금씩 중창 불사가 이루어져 18-19세기 전반에는 전각과 부속 암자의 규모가 89암자 24굴 요사 189채가 될 정도였다. 
선운사에는 유명한 스님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분은 백파(白坡, 1767-1852)선사이다. 선사의 법명은 긍선(亘琁), 속성은 전주이씨이다. 전북 무장에서 태어나 12세에 출가하여 선은사(禪隱寺) 시헌(詩憲) 스님의 제자가 된 뒤 연곡(蓮谷)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았으며, 21세 때 상언(尙彦)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평안북도 초산의 용문암(龍門庵)에서 수행하다가 도를 깨우쳤으며, 26세 때에 백양산 운문암(雲門庵)에서 강좌를 연 후 20여 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811년에는 “불법의 진실한 뜻이 문자에 있지 않고 도를 깨닫는 데 있는 데도 스스로 법에 어긋한 말만을 늘어놓았다”고 참회한 뒤, 평안북도 초산 용문동으로 들어가서 5년 동안 수선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다시 운문암에서 수도와 포교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때 선의 지침서인 <선문수경(禪門手鏡)>을 저술하였다. 여기서 백파는 중국 임제선사에 의해 주창된 조사선 우위 사상에 따라 선을 의리선, 여래선, 조사선으로 구분하고, 대기대용이 베풀어지면서 세상의 실상과 허상, 드러남과 감추어짐이 함께 작용하는 살활자재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리는 당시 선사들 사이에 반박을 일으켰는데, 특히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는 교와 선은 다른 것이 아니며,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입각처가 선이면 조사선이고, 교면 여래선으로 된다면서 ‘깨달으면 교가 선이 되고, 미혹하면 선이 교가 된다’는 유명한 명제를 내세웠다. 이처럼 선사들 사이의 논박은 불학 연구에 중요한 부분이고, 불교를 발전시키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그런데 이 논쟁의 와중에 기름을 끼얹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추사 김정희였다.
초의선사의 친한 벗이자 불교에도 박식했던 당대 최고의 문사인 김정희가 백파선사에게 그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편지를 보냈고, 선사는 이에 13가지로 논증한 답신을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추사는 다시 15가지로 선사의 논증이 잘못되었음을 적은 <백파망증 15조>를 보냈다. 그런데 이 추사의 편지가 다소 안하무인격으로 오만한 것이 놀랍다. 그 내용인 즉 다음과 같다. 

‘스님의 말씀이 이와 같은 것을 보니 선문의 모든 사람들은 자고이래로 거의 대부분 무식한 무리들뿐이라 더 이상 이렇고 저렇고 따질 거리가 못 되니 내가 이들을 상대로 그렇고 저렇고 따지는 것이 철부지 어린애와 떡 다툼하는 것 같아서 도리어 창피하도다. 이것이 스님의 망증 제1이오. ...... 아무런 심증도 없이 이것저것 주워 보태서 입으로만 지껄이는 그 꼴이 점점 볼 만하도다. 이것이 스님의 망증 제12요. ......’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렇게 대놓고 뻔뻔하게 비판하는 대담함에 놀라울 따름이다. 이에 대해 백파선사가 답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하는 말로는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고 덤비는 꼴”이라고 가볍게 받아넘겼다고 한다. 
백파선사가 돌아가시자 그의 제자들은 추사에게 비문을 청했고, 추사는 타개하기 1년 전 비문을 짓고. 글을 썼는데 그 내용은 <백파망증 15조>와는 전혀 다른 참으로 공손하고 스님에 대한 존경이 넘쳐나는 내용이다. 

‘...... 이제 백파의 비문을 지으면서 만약 대기대용, 이 한 구절을 크고 뚜렷하게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백파비로서는 부족하다 할 것이다. 설두, 백암 등 문도들에게 이것을 써주면서 과로(果老 : 추사의 별호, 즉 과천에 사는 노인)는 다음과 같이 부기하노라.’

가난하기는 송곳 꽂을 자리도 없었으나
기상은 수미산을 덮을 만하도다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였으니
그 가풍은 정말로 진실하도다
속세의 이름은 긍선이나
그 나머지야 말해 무엇하리오

완당학사 김정희가 찬하고 또 쓰다
           
이 김정희가 글을 짓고 쓴 백파율사비는 선운사 입구 오른쪽 숲 속에 자리한 부도 밭 중앙에 세워져 있다. 추사의 글씨라 많은 사람들이 탁본하다 보니 비면이 반들반들하다. 선운사에 가면 먼저 부도 밭에 들려 이 비석을 보고 백파선사와 초의선사의 열띤 논쟁과 한때 오만방자하게 비판했던 사람에게 한없는 존경의 마음을 전하는 추사의 마음을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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