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법문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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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법문 (57)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8.0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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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윤회

 

불교는 무아를 근본으로 하는 가르침이다. 초기경의 여러 곳에서 제법무아(諸法無我)가 강조되고 있으며, 오온에 대해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삿된 견해를 유신견이라고 해서 이를 타파하지 못하면 아무리 수승한 삼매의 경지를 체득하고 신통이 자재하더라도 깨달음의 처음 단계인 예류자도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렇듯 무아가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지만 윤회(輪廻)도 초기불교의 도처에서 강조되어 나타난다. 윤회는 삼사라(samsāra)를 옮긴 것이다. 문자적으로 삼사라는 ‘함께 움직이는 것, 혹은 함께 흘러가는 것’이라는 뜻인데, 중국에서는 주로 유전(流轉), 윤회, 전륜(轉輪), 유전생사(流轉生死), 생사로 옮겼다.
  이런 문자적인 의미로 보아도 삼사라는 힌두교의 윤회관인 자아의 재육화(
reincarnation, 再肉化)보다는 오히려 연기적 흐름에 가까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무아와 윤회는 일견 상호 모순되는 가르침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불교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무아이면서 윤회를 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하면서 부처님께서 윤회를 설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초기불전의 여러 곳에서 윤회를 설하셨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설하셨다.
  먼저,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다르다. 힌두교에서는 불변하는 자아(ātman)이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재육화하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재육화란 자아가 금생의 심장 안에 머물다가 금생의 몸이 죽으면 다시 내생의 몸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아의 윤회’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불교에서는 금생의 흐름(santati, 相續)이 내생으로 연결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재생(rebirth, 再生)을 윤회라 한다. 주석서에서는 오온, 12처, 18계가 연속하여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윤회는 서로 조건 지어져서 생멸 변천하는 일체 유위법의 연기적 흐름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의 윤회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 즉 ‘무아의 윤회’라고 할 수 있다.
  윤회는 찰나생 찰나멸의 흐름이다. 근본적 입장에서 보면 매찰나 전개되는 오온의 생멸 자체가 윤회이다. 한편 생사의 입장에서 보면 한 생에서의 마지막 마음, 즉 죽음의 마음이 일어났다 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윤회의 원인은 갈애와 무명이다. 부처님께서는 갈애를 ‘갈애를 재생으로 하게 하는 것(ponobhāvikā)이라고 정의하셨고, 12연기에서는 무명을 윤회의 근본원인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라한을 제외한 일체의 존재들에게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윤회의 흐름은 계속된다.
  윤회는 결코 방편설이 아니다. 부처님의 오도송(悟道頌)으로 알려진 『법구경』(Dhp. 153∼154)의 게송도 윤회와 윤회의 종식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집 짓는 자를 찾아 
나는 부질없이 치달려 왔다.
집 짓는 자여, 마침내 그대는 드러났구나.
그대는 다시 집을 짓지 못하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도다.
이제 마음은 업(業) 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다.” 
   
   - 이상으로, 초기불교 입문 강좌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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