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약속 /박정금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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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약속 /박정금 보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8.16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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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신행수기 공모 우수작

우리 앞에 지금 불어 닥친 슬픔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번 호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던 큰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가슴 아픔 이야기가 담긴 “그날의 약속”을 실었다. 엄청난 슬픔을 딛고서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눈물을 참고 신행에 힘쓰는 어머니의 절절한 마음을 담아낸 이야기가 큰 감동으로 전해진다. <편집자주>

 

 

명석이가 교통사고로 서귀포의 어느 의료원에 입원해 있다는 올케로부터 걸려온 짧은 국제전화에 왠지 모를 불안과 조바심으로 서성거리다가 한국의 올케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본다. 
이제 막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로 옮기는 중이라고 짧게만 대답하고 더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회사에 나가 있는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빨리 확인해 보라고 연락하고 난 10여분 뒤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병원 관계자의 얘기로는 수술은 잘 되었으니 안심하라는 말을 듣고 제주시내에 있는 친구에게 빨리 서귀포로 가서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하였다. 
두어 시간 뒤 한국에 있는 남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긴 얘기는 할 수가 없고 가능하면 서둘러 한국으로 왔으면 하는 말과 함께 아직 확실한 건 파악하지 못했으나 뇌에 이상 징후가 보여 빨리 2차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다급한 김에 남편이 주치의와 전화로 상담을 하고 가능하면 시설이 좋은 제주시내 병원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하고 늦은 밤 여기저기 항공편을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당시 우리 부부는 일본 동경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남편은 조그만 회사에 나는 우에노 근처에서 음식점을 손수 경영하고 있었다. 다음날 어렵사리 항공권을 구입하고 나리따 공항을 출발하여 인천에서 다시 김포로 간 다음 제주로 향하는 여정이 왜 이렇게 길고 험한지 가슴이 너무 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명석이를 보기 전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버텨낼 수 있다는 마음 하나로 겨우 지탱하고 있는데 부산에 살고 있는 명석이 작은 아빠가 전화가 왔다. 
지금 앰블런스로 제주시내 병원으로 옮기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작은 아빠에게 석이를 바꿔달라고 하자 명석이 귀에다 핸드폰을 갖다 됐으니 얘기를 하라고 한다. 
한참을 애타게 불러봐도 석이는 대답이 없다. 
그후 어떻게 석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있는 석이를 보니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 석이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착하고 정이 많던 석이가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3년 만에 엄마 아빠를 맞는단 말인가.
조금만 더 열심히 일해서 석이가 중학교 입학하는 날에는 영원히 한국에서 석이랑 함께 살 거라고 이틀 전에 전화로 약속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아무리 소리치고 흔들며 깨워 봐도 석이는 말 한 마디 없고 미동도 하지 않는다. 
불쌍한 내 아들 명석아! 석이는 일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치원까지 다니다가 초등학교 입학할 즈음 자기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꼭 한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늘 입버릇처럼 얘기한 터라 여러 가지 고민한 끝에 외할머님이 계시는 서귀포에 와서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한국에 왔어도 무리 없이 적응하고 3학년 때부터는 상도 많이 받고 제법 한국 티가 난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석이는 이제 완전한 한국인으로 성장해가는구나 라고 어느 정도 마음이 가벼워질 즈음 장대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바로 집 앞의 건널목에서 과속으로 달려오던 트럭에 치이고 말았다. 
그리고 9일 동안을 힘겹게 버티면서 3년이란 세월을 엄마 아빠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엄마! 이젠 실컷 봤어요 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 양 엷은 미소만을 남긴 채 2001년 7월15일 점심때쯤 석이는 영원히 엄마 아빠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험난한 타국에서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보고 싶어도 악착같이 노력해서 하루라도 빨리 석이랑 함께 살고픈 욕심 하나로 쉽게 한국으로 올 수가 없었다. 
어떻게 석이의 장례를 치렀는지도 모를 만큼 제 정신이 아닌 채 친정어머님이 다니시는 절에다 석이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세월은 참 무정하기도 하였다. 
눈물로 뒤범벅인 채 몇 날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는 사이 시간은 어느덧 석이의 사십구재를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랑하는 아들 석이의 사십구잿날. 
어떤 일이 있어도 절에 가서 눈물도 보이지 말고 석이를 위해 열심히 기도만 하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하면서 석이의 사십구재가 있는 절로 향했다. 
절이 보이기 시작하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법당 안 영단 위에 놓여있는 석이의 사진을 보는 순간 그토록 다짐하여 맹세했던 독한 마음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옛 어른들 말씀에 자식은 가슴에 묻는 거라고 하였는가보다. 석이의 초등학교 친구들이 꽃을 사들고 절까지 찾아왔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부모란 다 이렇게 한이 많은 것일까? 영단 위의 명석이 사진을 꺼내들고 가슴에 꼭 안아봤다. 따뜻한 온기가 내 전신을 휘감은 듯 온 몸이 사르르를 떨려왔다. 가을이라 그런지 그 날 따라 유난히 하늘이 맑고 푸르렀다. 
나는 불교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이십여 년을 외국에서 살다보니 불교를 가까이 할 만한 기회가 없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가까이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석이의 사십구잿날 법문 하시던 스님이 들려주신 부처님의 말씀에서 어렴풋이나마 나 자신을 스스로 내려놓을 수 있다는 아주 작은 희망과 석이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부처님을 마음속에 담고 살겠다고 석이의 사십구잿날 석이의 영정 사진 앞에서 마음 속 깊이 석이와 굳게 약속했다. 어쩌면 그것만이 가슴속에 묻어둔 석이에게 용서를 구하는 길이라고 생각을 했으니까. 
석이를 보내고 난 후 20여년의 외국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제주에 뼈를 묻기로 작정하고 제주시내에 조그만 밥집을 장만했다. 
내가 하는 일이 있어야 불필요한 상념들을 빨리 지울 수 있겠다 싶기도 했지만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해야 했었으니까. 
그리고 짬이 날 때마다 불교에 관련한 여러 가지 일에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쫓아 다녔다. 미천한 게 많은지라 불교대학도 두 번이나 다녔으며 배움이 있는 한 고급 경전반이며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한 보람으로 어느 종단의 합창단을 이끌어 가는 단장으로서도 최선을 다하고 살았다. 
벌써 하는 사이에 석이를 가슴에 묻은 지 올해가 17년째다. 
내가 만약 부처님과의 인연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존재하고는 있을까? 그 날 석이와 약속이 없었다면 지금에 나는 얼마나 비참했을까? 생각하면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다. 
이제는 정말 풍족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비록 가진 게 남들보다 넉넉하지 못해도 늘 부처님 곁에서 진실된 삶을 살고 있노라고 자부하며, 무늬만 불자가 아니라 진정한 불교인이라는 자신감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항상 뒤에서 말없이 지켜봐준 사랑하는 우리 식구들과 초심을 잃지 않도록 먼 곳에서 엄마를 지켜준 석이에게도, 어렵고 힘들 때 큰 버팀목이 되어주신 많은 스님들께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내 마음속의 진심을 전해본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칭찬에도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하리라 라고 말씀해주신 어느 스님의 글귀를 되뇌이며 한 움큼의 향을 들고 오늘도 부처님 전을 향해본다.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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