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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어디만큼 가고 있는가?”청화 스님 사자후 스님 사자후 (전 월정사단기출가학교장, 삼척 천은사 주지)

청화 선사는 부처님의 법은 현상과 그 본래 모습인 실상實相 모두를 하나로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근본을 떠난 우리는 모두가 다 실향민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여기서 불교는 참다운 고향을 찾는 공부라고 하십니다. 참다운 고향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항상 “지금 나는 어디만큼 가고 있는가?”이렇게 자기를 성찰해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편집자주>

 

청화 스님 1947년 세납 24세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금타 화상을 은사로 득도. 출가 이후 무안 해운사, 두륜산 진불암, 지리산 백장암.벽송사, 구례 사성암, 용문사 염불선원, 보리암 부소대, 부산 혜광사, 두륜산 상원암, 월출산 상견성암, 지리산 칠불사 등에서 수행정진하셨다. 1985년 전남 곡성군 죽곡면에 소재한 동리산 태안사에서 삼년결사를 시작으로 회상을 이루시고 대중교화의 인연을 지으셨다. 1995년 한국전쟁으로 화마를 입었던 태안사를 중창복원하여 구산선문 중 하나인 동리산문을 재건하셨다. 미주포교를 위해 카멜 삼보사, 팜스프링 금강선원 등을 건립하시고 삼년결사를 수행했다. 설령산 성륜사.도봉산 광륜사 조실,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계시다가 2003년 11월12일 열반하셨다.

이른바 위없는 부처님의 법왕법法王法은 말을 떠나고 일체상一切相을 떠나 있습니다. 상대적인 말이나 형상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법상에 오를 때 마땅히 상을 떠난 법문, 또는 말을 떠난 법문을 해야 합니다. 즉 우리 중생의 상대적이고 유한한 말을 떠난 참다운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기에 방을 탕탕 내리쳐서 선기(禪機)를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는 그런 자리가 아니므로 해설이 곁들여진 법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불이나 법회를 시작할 때 우리는“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하면서 삼보에 귀의하는 예를 올립니다.‘양족존’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자비나 지혜와 같은 모든 덕성을 완전히 구비한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일일이 다 이야기 하자면 비단 자비나 지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자비와 지혜의 두 속성을 들어서 부처님의 공덕을 표현합니다. 
그럼“부처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 불자들은 이런 질문을 항시 하게 됩니다. 부처님께 귀의해서 일 년이 된 분이나 또는 십년이 된 분이나, 몇십 년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질문을 하기는 마찬가집니다. 누구든 성불하여 부처가 되기 전까지는, 부처님은 대체 어떤 분인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질문에 바르게 해답할 수 있어야 수행도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말이나 문자로는 부처님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부처’라고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또는 인과율을 초월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현상적인 형상만 보고 상대적인 문제만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부처님이 현상적인 문제를 떠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현상과 그 본래 모습인 실상實相 모두를 하나로 보는 것이 부처님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안목이 짧아서 실상을 보지 못하고 현상만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참다운 세계, 본래진면목의 세계가 우리 중생이 볼 수 있는 현상의 세계와 둘이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하나의 현상은 모두가 다 실상이 형상화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바다에 대한 파도의 관계와 같습니다. 바닷물 자체가 실상, 곧 체體에 해당한다면 여기서 일어나는 온갖 거품이나 파도는 현상인 용用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바닷물을 떠난 파도와 거품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현상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자기 한계상황을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이 현상적인 세계만 본다면, 우리 중생은 평생 동안 인생 고해에서 헤매다가 맙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근본을 떠난 우리는 모두가 다 실향민입니다. 우리 민족은 지금 1천만의 실향민 때문에 피차 서로 가슴을 앓고 있습니다만, 비단 이북에서 온 1천만 동포들만 실향민인 것은 아닙니다. 깨달은 성자를 제외한 세계 50억 인종의 범부중생은 모두가 다 자기 고향을 떠난 실향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본 성품을 스스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비록 제아무리 분별시비하는 학식이 많다 할지라도 실향민의 범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참다운 본성을 찾는, 참다운 고향을 찾는 공부라 할 수 있습니다. 참다운 고향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항상 “지금 나는 어디만큼 가고 있는가?”이렇게 자기를 성찰해 보고 자기 반추를 해 봐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이 추구하는 안락은 오욕락이라는 상대적이고 유한한 쾌락입니다. 오욕락이란 재財․색色․명名․식食․수睡를 말합니다. 재물이나 이성에 대한 욕심, 명예, 음식, 또는 잠 욕심, 이런 것은 분명 오욕락인데, 우리 중생들은 이런 것들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곧 인간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나 예수, 공자나 노자, 혹은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들은 이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이것을 제목으로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모두가 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우리 중생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것이 모두라고 여기고 참다운 실상, 그  본성품을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고향자리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실향민인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 현상세계는 인연 따라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지 실존적인 것이 못 됩니다. 
루터가 법문을 할 때, 법상-물론 지금 여기의 법상과는 다르겠습니다만-에 올라가면 먼저 가만히 하늘을 한참 우러러본 다음에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루터가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영원한 진리와 자신과의 거리를 없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당에 올라서 하는 법문이라는 것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영원한 진리의 차원을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바로 참다운 성품 자리로 가는 성불의 길이기 때문에, 거기서 한발짝만 벗어나게 되면 죽고 사는 길에 떨어지고 맙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오욕락, 즉 재물에 눈이 어둡고, 이성에 대한 욕망에 눈이 어둡고, 명예나 음식 또는 잠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 생활, 이런 것에 얽매인 생활은 모두가 다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재물, 명예, 잠, 음식, 수면 심지어는 자기 몸뚱이까지도 결국에는 스러지고 마는 것 아닙니까? 어느 땐가는 죽고 맙니다. 어느땐가 소멸해서 목숨이 다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이 몸뚱입니다. 내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몸뚱이 이대로 생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평생 동안의 자기 행위에 따라서 다시 다른 몸을 받는 것이고, 지금 이 몸은 이 생으로 끝나고 맙니다. 
이 몸뚱이는 인연 따라서 잠시 동안 이런 저런 요소들이 모여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반 변하는 것 같지 않지만, 변화무쌍하여서 오늘 죽어 없어질지 내일 죽어 없어질지 모르는 것이 바로 이 몸뚱이입니다. 이런 것에 우리 마음을 두고 사는 것, 그게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애지중지 아끼는 재물도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재물이든 명예든 상대적이고 유한한 것에 얽매여 사는 생활, 그건 예외 없이 죽음에 이르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걸음만 밖으로 나가도 온갖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고 맙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는 대체 무엇인가? 머잖아 우리는 이북과도 합해야 하는데, 주체사상은 어떠한 것인가? 또는, 우리 한민족 가운데 천오백만을 헤아리는 신도를 가진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것인가? 아직도 우리 사회의 근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교는 어떠한 종교인가? 이런 문제에 부딪히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문제에 명확한 해답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슬기로운 어머니가 되고, 참된 아버지가 되고, 지혜로운 스승, 총명한 사회인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바른 사회인도, 바른 어버이도, 바른 스승도 못 됩니다. 
다른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안다는 것은 나의 종교나 이념을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종교를 모른다는 것은 나의 종교를 모른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자신의 것을 비교해서 생각하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오늘날에는 적어도 20대부터 자기 인생관, 자기 철학이 확고히 서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와 같이 모든 중생에게 참다운 길이 어떤 것인가, 우주의 본바탕은 무엇인가, 상대적인 생각을 떠나서 영원히 변치 않은 부동의 진리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비단 부처님의 가르침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이나 유교경전, 혹은 마호메트의 코란이나 모두가 다 죽음에 이르는 가르침이 아니라 죽지 않고 영생에 이르는 가르침입니다. 무상하기 그지없는 자기 몸뚱이나 재산, 헛된 명예나 이성 간의 욕망에서 벗어나 참되고 변치 않는 불멸의 진리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 모든 성자들의 가르침입니다.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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