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끝 고행 시작
상태바
행복 끝 고행 시작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09.12 12: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행복한 고행 - 인도 불교 성지를 중심으로 ② /오영호 시인

사)봉려관선양회 상임이사이며 혜향편집장인 오영호 시인은 인도를 어떻게 봤을까. 이번 호에는 그 두 번째 이야기로 시인은 여기서 바라나시의 풍광, 영불탑과 녹야원, 불교박물관 등을 둘러보면서 인도의 숨은 잠재력을 느꼈다고 전한다. <편집자주>

 

깨닫고 난 후 처음으로 오신 곳 사르나트
오비구 귀의하고 교단 성립 시발점 된 곳
 

 흐리지도 맑지도 않은 아침이다. 바라나시로 가기 위해 다시 델리 공항으로 갔다. 인도 국내 비행기를 타는 것이지만 수속이 까다롭다. 내 자리 옆엔 4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 인도인이다. 둘 다 심심한지 핸드폰을 갖고 논다. 영어 실력이 짧아 대화를 못하니 2시간 동안 지루함만 쌓이고 쌓였다. 비행 끝에 바라나시 공항에 내리자 여기도 찜통이다. 버스가 왔다. 우리나라 중고 버스보다도 낡아 보인다. 이 버스를 타고 일주일 동안 같이 움직여야 한다니 영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에어컨은 잘 작동되어 천만다행이었다. 
 모두들 합장을 하고 목탁소리에 맞춰 반야심경을 봉송한다. 혜전 스님은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순례를 마치고 돌아갈 수 있도록 부처님께 발원한다. 기도가 끝나자 인도인 가이드 바나라 싱은 ‘행복 끝 고행 시작’이라고 한 마디 던진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차창을 때린다. 버스는 곡예운전을 한다. 아슬아슬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오금이 저렸다. 앞자리에 앉아서 더 그랬다. 때론 역주행도 한다. 교통법규가 있는지 없는지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 앞에 차나 오토바이를 비롯한 장애물이 나타나면 때도 없이 경적을 울린다. 그러면서 잘도 빠져나간다. 그리고 또 하나 가관인 일은 지나가는 버스, 릭샤, 오토바이는 아예 정원이 없는 것 같다. 어떤 버스는 버스 위에도 사람들이 가득 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차문에 손잡이를 잡고 타고 가는 사람도 있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타기 전 승객은 운전수에게 만약 사고가 나도 자기 책임이라고 확약하고 태워준다고 한다. 사고 나면 승객 탓이지 운전수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빈민들의 중요 생계수단이며 서민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인 릭샤는 도로 어디에서든지 앞만 보고 달린다. 그래서 뭐라 말해야 하나. 좋은 말로 스릴이지만 죽음을 담보한 질주인 것 같다. 심지어 고속도로에도 모든 차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횡단하여 건너다닌다. 무법천지다. 그러나 사고 난 것을 볼 수가 없으니 이게 인도의 교통문화가 아닌가 싶다. 법 위에 무질서인지 무질서 위에 법인지 헷갈리게 하는 일이 다반사인 것 같다. 
 차창 밖으로 풍경을 보며 인도를 상징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가이드에게 물었다. 인도의 국화는? 연꽃. 열매는? 망고. 나무는? 보리수. 동물은? 호랑이. 그리고 국기엔 가운데 24개의 축을 가진 파란색 법륜이 있다는 것. 나라의 표어는 ‘진실만이 이긴다’는 것 등 모르면 묻고 의심이 나면 또 물었다. 

바라나시 메인 가트


 인도는 크고 다양한 문화를 가진 나라다. 그런 나라로는 중국, 인도네시아, 러시아 등인데, 중국은 소수민족이 56개, 인도네시아와 러시아도 200여개 민족과 언어를 가지고 있는 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인도는 언어만도 1,000여 개가 넘고, 인종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리안계의 인도인만 있는 게 아니라, 흑인도 있고, 동북아인도 있다. 이들은 미국 같이 근대에 이주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원주민이라는 게 더 놀라운 점이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종교가 다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종종교란 각자의 옷처럼 사람 수만큼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GDP가 세계 7위라지만 빈부의 격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나다고 하니 아이러니컬하다. 그렇지만 앞으로 중국에 맞짱 뜰 수 있는 나라는 오로지 인도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한 마디로 인도는 여러 가지로 많은 잠재력을 갖고 있는 나라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녹야원을 가다 

영불탑
버스는 바라나시 북방 약 7㎞에 위치한 성지 사르나트로 달려갔다. 먼저 본 것은 영불탑이다. 녹야원 가는 바로 앞 길옆에 있다. 수자타의 유미죽(우유가 들어간 죽)을 마시는 붓다를 보고 타락했다고 하여 같이 수행하던 5비구(교진여, 마하남, 마사지, 발부, 바제루)가 떠나서 녹야원에서 그들끼리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 후 정각을 이룬 석가모니 부처님은 5비구를 만나 법을 전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왔다. 인사도 안하려던 다섯 비구는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에 그만 귀의하게 된다. 부처님을 처음 맞이한 곳이라 해서 이 영불탑이 섰다고 한다. 

고고박물관
영불탑 바로 옆에 있는 박물관도 둘러보았다. 사르나트 고고박물관에는 아쇼카의 석주두, 초전법륜상 등 국보급 문화재가 다수 진열 보존되고 있었다. 특히 네 마리의 사자상으로 된 두주는 인도 미술 최고의 걸작에 속하는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이 박물관은 1904년에 건립했는데 이 지방에서 출토된 구산 왕조 및 급타 왕조 시대의 불교 조각을 중심으로 기원 전 3세기에서 12세기까지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세세하게 볼 수가 없어 눈요기만 한 기분이다. 또한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어 아쉬움이 더 했다. 

 

사르나트의 녹야원 대탑

녹야원 
박물관을 나와 바로 옆에 있는 녹야원으로 걸어갔다. 부처님께서 위없는 깨달음을 증득한 후 처음 설법하신 곳이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들어서자 폐허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숙연해진다.  
 출요경(出曜經)에 의하면 과거에 바라나 국왕이 이곳에 이르러 사냥을 할 때에 1,000마리의 사슴을 생포했는데, 사슴의 왕이 하루에 1마리씩 식용으로 보내주겠다고 애원하여 모든 사슴이 풀려나게 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녹야원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지금도 사육하는 사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날씨가 더워서 그곳까지 가지는 못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룬 뒤 교진여를 비롯한 다섯 수행자들이 머물고 있는 이곳 사르나트로 오시게 되었다. 이때 언덕 위에서 멀리 다가오는 석가모니의 깨달은 모습은 성인만이 갖추게 하는 32상호를 보게 된다. 그래서 서로 모른 척 하기로 약속했던 교진여(橋陣如)를 비롯한 5명의 수행자들은 스스로 귀의하였다. 이들의 귀의로 비구(比丘))가 처음 생겨났으며 이와 더불어 불교교단이 비로소 성립되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초기 경전에서부터 이곳은 석가모니가 태어난 룸비니,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열반에 든 쿠시나가라와 함께 불교도들이 꼭 순례해야 할 4곳 가운데 하나다. 이후 아소카 왕이 불교성지를 순례하면서 이곳에 탑과 석주(石株)를 세운 뒤 더욱 많은 신도들의 숭앙을 받아왔으며, 8세기 초 현장(玄奘)이 순례할 당시만 해도 이곳은 약 30m 높이의 정사(精舍)가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100여 단이나 되는 감실(옥좌 위나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의 모형으로, 작은 금동불이나 목불을 모시는 집)에는 황금 불상과 부조가 있었다. 안쪽에는 초전법륜상(初傳法輪像)이 줄지어 있고 1,000여 명의 승려가 거주하는 등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3세기 무렵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에게 유린되어 폐허가 되고 말았다. 현재는 2층 원탑(二層圓塔)과 부러진 아소카 왕의 석주 등이 남아 있으며 많은 불상이 출토되고 있다. 이 가운데 아소카 왕의 석주 머리에 있던,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4마리의 사자상은 현재 인도의 국장(國章, 국가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정수일 님이 역주한「왕오천축구전」에 들어 있는 한시를 우리말로 해석한 혜초 스님의 녹야원에 대한 시를  음미해 보자.   

보리수 없다고 걱정하지 않았는데 
어찌 녹야원을 멀다 하리
그저 근심거리는 험한 벼랑길 뿐 
업풍(業風) 몰아쳐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여덟 탑을 보기란 참으로 어려워라 
어지러이 긴 세월 지나며 불타버렸다
어찌 한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질까만 
오늘 아침 내 눈으로 보고 있노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