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 태화산 마곡사(麻谷寺)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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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 태화산 마곡사(麻谷寺) (1)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10.04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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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선생, 하룻밤 청정한 인연으로 출가
수계사 용담스님께 불교 배운 뒤 서울로 떠나 
 

일제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찍은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마곡사 전경 사진. 마곡사로 향하던 김구선생은“안개를 헤치고 산문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갔다. 걸음마다 내 몸은 더러운 세계에서 깨끗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옮아가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황해도에서 동학군을 이끌다 서울에서 내려온  관군과 왜병의 토벌 작전에 동학군이 전멸하고 나는 해주 인근 청계동에 있는 안 진사댁으로 피신하였다. 머무른 기간은 4, 5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곳에서 안 진사(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와 고 산림(처사라는 의미, 이름은 능선) 두 분으로부터 학문과 약소국가 남아가 지켜야 할 도리를 배웠다. 그 후 중국으로 가기 위해 방랑하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듬해 2월 나루터 주막에서 변복한 일본 육군 중위를 쳐서 죽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죽였노라 - 해주 백운방 김창수’라는 포고문을 붙이고 집으로 돌아갔다. 피하라는 부모의 권고에도 정당한 일을 했으니 비겁하게 피하지 않겠다며 집에서 잡으러 오길 기다렸다. 석 달이 지난 후 잡혀서 해주옥에 갇혔다. 이후 인천 감옥으로 옮겨져 특별 재판이 이루어졌는데 내가 한 일을 당당히 말하니 재판관이나 방청객들이 모두 시원해했다.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책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사형 직전 고종황제가 우연히 국모의 복수라는 나의 죄명을 알게 되어 사면하였다. 사면되었지만 명령이 인천까지 닿는 데는 시일이 걸리는데 때 마침 서울과 인천 간 전화가 개통되어 그 사면령이 전화로 내려져 사형을 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쉽게 옥에서 풀려나오기 어려워서, 결국 2년 동안 갇혔던 옥에서 도망쳐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전라도 지방을 거쳐 충청도로 올라와 계룡산 갑사에서 쉬고 있다가 동학사에서 왔다는 이씨를 만나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씨는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려 하는데 나도 같이 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중이 될 마음도 없지는 아니하나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대답은 하지 않고 이씨와 함께 마곡사로 동행하였다.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민족의 해방’이라던 백범 김구선생.


 마곡사 앞 고개에 올라선 때는 이미 황혼이었다. 산에 가득 단풍이 울긋불긋하여 감회가 깊었는데, 저녁 안개에 잠긴 마곡사의 모습은 세속에 물든 우리를 피하는 듯하였다. 댕댕 저녁 예불을 알리는 인경이 울렸다. 일체 번뇌를 버리라 하는 것 같이 들렸다.
 이씨가 다시 물었다.
 “김 형, 어찌하시려오? 세사를 다 잊고 나와 같이 중이 됩시다.”
 나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서 말하면 무엇하고? 중이 되려는 자와 중을 만드는 자와 마주 대한 자리에서 작정합시다.”
 우리는 안개를 헤치고 산문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갔다. 걸음마다 내 몸은 더러운 세계에서 깨끗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옮아가는 것이었다. 매화당을 지나 심검당에 들어가니 노승 한 분이 그림을 펴놓고 보다가 우리를 보고 인사했다. 저녁상이 나온 후 어떤 노승 한 분이 내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자신은 중이 된 지 50년이 되는데 은근히 나더러 상좌가 되기를 청했다. 나는 본시 재질이 둔하고 학식이 천박하니 노사에게 누가 될까 두렵다고 사양하였더니 그는 내가 상좌만 되면, 고명한 스승 밑에서 공부하여 장차 큰 강사가 될 수 있다며 다시 권했다. 이튿날 같이 온 이씨는 이미 머리를 밀고 와서 내게 어제 오신 분은 하은당으로 이 절에서 가장 부자인 보경 대사의 상좌이니, 내가 그 분의 상좌만 되면 공부 걱정은 없을 것이라 삭발을 권하였다. 나도 하룻밤 청정한 생활에 세상의 모든 잡념이 사라져서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였다. 
 얼마 후 나는 놋칼을 든 사제 호덕삼을 따라 냇가로 가서 쭈그리고 앉았다. 덕삼은 삭발진언을 부르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뚝 떨어졌다. 이미 결심한 일이지만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떨어짐을 금할 수 없었다. 법당에서 나의 득도식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은사 하은당은 내 법명을 원종이라고 명하고 내게 오계를 주었다. 이후 중의 여러 가지 예법과 규율을 배웠다. 은사 하은당은 자신의 상좌가 되라고 청할 때는 그렇게도 공손하더니 당장 그날 오후부터 “생기기를 미련하게 생겨먹었으니 고명한 중이 될까 싶다. 어서 가서 나무도 해오고 물도 길어.”라며 종처럼 부리려 했다. 중이 되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라 깜짝 놀랐지만 기왕 중이 되었으니 하라는 대로 순종하자며 하라는 것은 다했다.       

김구 선생이 친필사인한 백범일지.


 나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다른 사미들과 같이 예불하는 법이며 천수경, 심경 같은 것을 외고 또 수계사인 용담 스님으로부터 배웠다. 용담스님은 불학뿐만 아니라 유학도 잘 아시어 누구나 존경할 만한 높은 스승이었다. 큰 스님도 하은당의 가풍이 괴상함을 가끔 걱정하시면서 나를 위로하였다. 나를 볶으시는 것이 모두 내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반년이 흐른 후 나는 속세의 일들이 궁금하여 하루는 보경당께 “소승이 중이 된 이상 중으로서 배울 것을 배워야 하겠사오니 금강산으로 가서 경 공부를 하여 충실한 불자가 되겠나이다.” 하고 아뢰니 보경당께서는 “내 벌써 그럴 줄 알았다. 내 원이 그러한 데 할 수 있겠냐.”하시고 하은당을 불러 설득해 주셨다. 그 후 스님이 주신 미곡 열 섬으로 노자를 만들어 마곡사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 (『백범일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선생(1876-1949)의 자서전인 백범일지의 내용이다. 사찰 순례에 갑자기 김구선생의 이야기가 나와 ‘이게 뭐지?’라고 생각하신 분도 있을 것이다. 나라가 어지러웠던 120년쯤 전 우리나라 사찰의 모습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당시 승려가 되는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록이어서 그 이야기를 크게 줄이지 않고 정리했다. 마침 얼마 전 대통령께서 평양을 방문해 평양 거리에서 카퍼레이드 하는 광경을 보며 ‘1948년 남북한이 함께 선거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평양을 방문했던 김구선생이 이 광경을 보시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우리나라 7곳의 산사 중 한 곳이 바로 마곡사이다. 마곡사와 관련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김구선생의 출가처라는 것이다. 마곡사에 가면 평생을 오직 민족의 해방과 통일만은 염원한 김구선생의 흔적을 찾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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