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정사와 나란다 대학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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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정사와 나란다 대학을 가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10.31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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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고행 - 인도 불교 성지를 중심으로 ⑧/오영호 시인

 오영호 시인과 순례객들은 빔비사라왕이 부처님과 제자들을 위해 마련했다는 불교 최초의 정사 죽림정사와 지금은 폐허만 남아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한 상인들의 보시를 바탕으로 건립돼 불교사상을 완성시킨 곳 나란다 대학터를 둘러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편집자주>

죽림정사

 

 죽림정사
 석존의 가르침에 따라 ‘위없는 깨달음’을 증득하려는 사람들에게 고정적인 수행처로 세운 곳이 베누반 비하르에 있는 죽림정사다. 마가다 16국 시대 최대 강국이었던 마가다국을 다스리던 빔비사라왕은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편히 머물며 설법도 할 수 있도록 정사를 찾고 있었다. 그런 곳을 찾던 중 왕궁에서 그리 멀지도 않고, 영축산도 가깝고, 목욕도 할 수 있는 따또빠니(온천)도 있는 곳에서 가까운 큰 대나무 숲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땅의 주인은 칼란다라는 큰 부자였는데 빔비사라왕의 간청으로 기부를 받는다. 이 터에 빔비사라왕이 불교 최초의 정사 죽림정사를 세웠다. 
부처님은 초년에 이곳에 살면서 오랫동안 법을 설하셨다고 한다. 지금까지 대밭 속에 세운 정사로 알려져 있는데 아쉽게도 절은 없다. 대나무가 한두 군데 보일 뿐이다. 그러나 크고 아름찬 보리수나무를 비롯한 큰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놓고 있다. 조금 들어가니 커다란 칼란다 장자의 연못이 있다. 연못 끝 둔덕에 부처님 상이 보인다. 기대가 커서 그런가. 생각보다 뭐 볼 것이 없다. 그러나 2562년 전 부처님이 태어나서 그 발자취를 찾아 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쁨이고 감사할 일이 아닌가. 
몇 컷 사진을 찍고 나왔다. 그런데 조금 큰길로 나왔는데 사람도 많고 차도 막혀서 버스는 오랫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다. 덕분에 시골 장터를 방불케 하는 다양한 모습을 잠시나마 볼 수 있었다. 사실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길가 가게들이 다양하다. 특히 먹을 것을 만들어 파는 음식점이나 시원한 음료수를 파는 곳은 사람이 더 붐비고 있다. 그러나 술을 파는 곳은 한 곳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 바라나시 보드가야를 비롯한 비하르즈는 술을 팔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마실 수도 없다. 만약 다른 곳에서 밀반입하거나 갖고 와서 마시다 적발되면 7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게 되어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이 지역은 빈곤층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살림도 꾸려나가기가 어려운데 남편들이 음주로 인하여 가난과 폭력이 점점 심해져갔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여성단체들이 선거 때마다 후보 및 주 정부에 강력한 요구로 받아들여 금주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오늘 날도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 

 

나란다 대학 터

나란다 대학 터 
 대학 입구에 도착하자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있다. 그 중에는 유독 돋보이는 두 명의 여학생과 한 명의 남학생이 보였다. 키도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또렷하여 멋지게 보였다. 다가가 한 사람 한 사람 손으로 가리키며 ‘원 투 쓰리 브라더?’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웃으며 ‘원 투 쓰리’ 라 대답하며 그렇다는 표정이다. 옆에는 엄마와 아빠가 서서 웃으며 보고 있다. 부유한 가정 같다. 옷차림도 다른 분들과는 달리 고급스럽게 보이고 품위가 있다. 
 들어서자 길옆으로 큰 나무들이 즐비하다. 둘레며 높이가 만만치 않다. 오랜 세월을 간직한 것을 알 수 있다. 아소카 왕의 이름을 따서 아소카 나뭇길이라고 한다. 
 유적지에 들어서자 모든 건물들이 다 부서지고 붉은 벽돌만 그 때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검게 그을린 벽들도 보인다. 화재로 인한 그을림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규모가 대단하다. 그래서 이미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너무 더워서 일행은 큰 망고나무 아래로 갔다. 시원하다. 쉬고 있는데 입구에서 만났던 그 가족들도 망고나무 아래로 와 앉는다. 뭘 하나라도 주고 싶다. 허리 쌕에서 껌을 꺼냈다. 한 개씩 줬다. 웃으며 받는다. 많지 않아서 주위에 있는 분들을 다 주지 못해 좀 쑥스러웠다.  
나란다 대학 터는 인도 비하르주 파트나 남서쪽 마가다왕국의 수도 왕사성 북쪽에 있다. 이 유적은 쿠마라굽타 1세가 나란다 사원을 창건한 후 역대 굽타왕조에 의해 증축 확대되었다. ‘나란다’에서 ‘나란’은 연꽃을 말하고, ‘다’란 피우다 는 말이다. 그러니까 ‘연꽃을 피우다’ 는 뜻이다. 여기에서 연꽃은 지혜를 상징하기 때문에 ‘지혜를 피우는 자리’ 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1915년 발굴된 이곳은 남북 500m 동서 250m의 넓이다. 여기엔 사각형의 수도원, 5동의 사찰, 10동의 승방 등이 있었음을 확인됐다. 그래서 수많은 승려와 학자들이 공부와 연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7세기에 유학 온 중국 승려 현장 스님은 승려학자가 3,000 명에 이른다고 기술해 놓고 있다. 이 대학에 들어가려면 입학시험을 보았는데 구술시험으로 판정했다고 한다. 세계 각국 학식과 재능을 갖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합격하는 사람은 10 명 중 3~4명 정도 밖에 안됐다고 한다. 신라의 혜초 스님도 재수 끝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공부하는 과목도 불경뿐만 아니라 수학, 천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렇게 융성했던 대학도 12세기 인도를 침범해 무굴제국을 이룬 이슬람교에 의해 산산이 폐허가 되고 말았다. 많은 스님들이 목숨을 잃었고, 불경을 태우는 데도 몇 달이 걸렸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책들이 있었음을 상상해 볼 수가 있다. 당시 무슬림들이 인도 사회의 중심에 있던 스님과 대학을 없앰으로써 영원한 지배를 꿈꿨다. 그러나 그들도 멸망의 길을 걸었고, 유적은 땅속에 묻혀 700년 세월을 지나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망고나무 아래에 앉았다. 올려다보니 큰 나무에 비해 망고는 몇 개밖에 안 달렸다. 이번에 북인도 여행을 하며 실컷 먹은 과일은 망고다. 길가나 마을 한 복판 등 보이는 나무는 망고나무라 할 정도로 많았다. 
나란다 대학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한 상인들의 보시를 바탕으로 건립돼 불교사상을 완성시킨 곳이었다. 특히 부처님의 10대 제자의 한 분인 사리불의 고향인 나란다에 건립하게 된 것도 사리불을 우러러 숭상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 것을 증명하는 탑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유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학의 규모라든지 과학적 설계 등 당시 불교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폐허만 남았으니 그저 애석할 따름이다.  
 나오면서 금강경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일체유의법(一切有意法) 
여몽환포영(如夢幻抱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풀이하면 이 세상 모든 생멸법은 다 꿈이고, 환상이요, 물거품이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와 같은 것이니 응당 이와 같이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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