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적 사랑이 만든 꿈의 궁전‘타지마할’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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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적 사랑이 만든 꿈의 궁전‘타지마할’을 보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11.2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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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고행 - 인도 불교 성지를 중심으로 ⑪/오영호 시인

오영호 시인과 순례객들은 인도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알려진 타지마할로 향했다. 순례객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무슬림 예술의 최대 보석으로 일컬어지는 타지마할을 통해 건축물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16세기 초 무굴제국의 흥망성쇠도 엿볼 수 있었다. <편집자주>

 

타지마할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오영호 시인

 16세기 초 무굴제국(이슬람왕조)의 수도 아그라에 타지마할과 아그라궁이 있다. 여기는 다른 곳보다 더 혼잡하다. 한 마디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도로로 나온 것 같다. 버스, 트럭, 오토릭샤, 자전거 릭샤, 승용차, 개, 소, 황단하는 사람 등 4차선 도로를 걷고, 달리고, 심지어 누워 있기도 하다. 
타지마할에 도착하자 이곳도 인산인해다. 다시 입구까지 오가는 버스를 타야하는데 전쟁터나 다름없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맞은편 모자 가게 상점 주인이 나를 계속 쳐다본다. 그러다가 내 앞으로 왔다. 자기 집에 좋은 모자들이 있으니 하나 팔아볼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갖고 온 모자를 보여주었다. 상표를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돌아간다. 입장료가 230불이라 한다. 그런데 자국인들은 10/1인 23불이다. 중국과 같다. 다른 유명한 관광지처럼 여기에서도 보안 검색을 한다. 입구를 들어가자 타지마할이 한 눈에 들어온다. 화장실을 찾았다. 사용료를 받고 있다. 입장료 230불을 받고 화장실 사용료까지 받고 있으니 씁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타지마할도 세계 신 7대 불가사의인 중국의 만리장성, 페루의 마추픽추, 이탈리아 콜로세움 등과 함께 당당히 들어 있다. 그리고 세계 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무슬림 예술의 최대 보석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래서 타지마할을 보지 않고 인도를 떠난 사람은 반드시 되돌아오게 된다는 설이 있듯이 타지마할은 인도여행자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상징 같은 존재다. 
 잔잔히 흐르는 야무나 강을 따라 은은한 빛을 발하는 하얀 대리석 무덤의 주인은 ‘황궁의 보석’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뭄타즈 마할이다. 그녀는 샤 자한 왕의 외사촌 동생이자 세 번째 부인이었다. 무굴 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 왕은 영토 확장을 위한 원정길에 오르며 뭄타즈 마할 왕비를 대동했다. 당시 만삭의 몸이었던 뭄타즈 마할은 막사에서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고, 이에 몹시 상심한 샤 자한 왕은 본국으로 돌아와 백성들에게 2년 동안 왕비를 추모하는 기간을 갖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로 깊어 가는 그리움에 샤 자한 왕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무덤을 만들었다. 타지마할은 거대한 정사각형 정원이 수로와 길을 따라 넷으로 나뉘며 각 공간들은 다시 사등분된다. 수로 끝에 있는 타지마할 묘궁은 중앙 돔을 중심으로 완벽한 좌우 대칭을 이루고, 동서남북 네 방향에 서 있는 첨탑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완벽한 대칭이다. 


 건물이 완성될 당시에는 뭄타즈 마할의 묘만 있었지만 현재는 샤 자한 왕과 함께 잠들어 있다. 1층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관이 있는데, 이곳은 상징적인 모형이고, 유골은 지하의 똑같은 위치에 안장되어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되는 인도의 타지마할도 ‘세기적인 사랑’이 탄생시킨 걸작이다.
건축에는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우즈베크 이탈리아 프랑스 라자스탄에서 수입된 대리석·청금석·홍옥석·공작석·터키석 등의 석재를 사용했고 외벽은 루비, 사파이어, 옥과 같은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500킬로그램 이상의 금이 사용되었다. 이 모든 경비는 샤 자한이 현금으로 지불했다. 전체 비용은 400~500만 루피로 추측되는데 당시 최고 기술을 가진 석공의 한 달 임금은 9~20루피였다. 타지마할을 건설하면서 지출한 비용 규모는 국가 전체 예산의 5분의 1이었다. 때문에 나라의 경제가 많이 흔들렸고 결국은 아들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기도 했다. 
 중심부의 기다란 연못에 비쳐 보이는 타지마할의 모습은 그 신비스러움을 더한다. 여기에 들어오는 모든 관광객은 거의 이 연못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포토 존이 되는 자리는 줄을 서서 기다린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타지마할과 못 속에 타지마할 그림자가 반영되어 나타난다.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타지마할 입구에서 묘까지 거리는 250미터다. ‘백색의 진주’, ‘꿈의 궁전’으로 불리는 타지마할은 낮에는 흰색으로 보이지만 아침에는 자줏빛, 황혼녘에는 황금빛으로 변하며 시시각각 보랏빛과 푸른빛 등 그 색채가 수없이 변한다고 한다. 달빛에 반사되어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기 위해 밤에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무굴제국의 왕이었던 아크바르에게는 자한기르라는 아들이 있었다. 때가 되면 왕이 될 터인데도 아버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된다. 그리고 자한기르 왕에게도 사자한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사자한 역시 아버지 자한기르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다. 자한기르는 반란을 진압했는데 몸이 쇠약해서 곧 죽고 만다. 아버지가 죽자 샤자한은 사촌형제를 죽이거나 추방시키면서 왕위에 오른다. 넓은 영토를 차지하며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이끈다. 원래 샤자한은 야무나강 건너편에 타지마할 같은 자신의 묘를 검정 대리석으로 건설해 견고한 황금다리로 타지마할과 연결할 계획이었지만 그의 거창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샤자한은 국민들의 세금을 올리지 않고 자신이 가진 권력과 재산을 이용해 타지마할을 건설했지만 아들 아우랑제브(1618~1707)는 샤자한의 무차별한 재산 낭비가 왕국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왕위를 찬탈했다. 샤자한은 생애 마지막 8년을 아그라성에서 보냈다. 그래도 아우랑제브는 아버지의 소원 하나는 들어주었다. 하얗게 빛나는 위대한 사랑의 증거를 아그라성에서 내려다볼 수 있게 한 것이다.아그라성은 악바르가 건설한 성으로 높이 20미터, 폭 2.5킬로미터의 대형 요새였으나 샤자한이 황제가 된 후 평화정책을 견지해 타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궁전으로 바꾼 것이다. 근래 외벽 문양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발견되었다. “세계가 멸망하고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뭄타즈 마할과 샤자한이 부활할 것이다.”무굴제국이 최고 전성기를 구가할 때 건설된 타지마할은 끊임없이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은으로 만든 출입문은 녹여지고 대신 구리 문이 세워졌으며 수많은 귀금속들이 약탈되었다.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인들은 돔의 금박을 떼어내고 구리로 대체했다. 인도 독립 후 지속적인 복원사업으로 타지마할은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게 되었다.

오탁번 시인은 ‘타지마할’을 이렇게 노래했다.   

이맘때쯤 다시 만나기로 하자 
이제 여기서 헤어지고 나면 
가을 깊어가고 겨울이 오고 
또 몇 백 년 강물이 흐른 뒤 
야무라 강이든 갠지스 강이든 
저 멀리 남한강이든 
그 강물 흘러가는 어디쯤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자 
손톱 밑으로 빠져나가는 
시간의 햇살 따라 
벵골만 건너 캘커타 지나
아그라 붉은 태양 아래 흰 대리석으로 빛나는 타지마할 
죽은 다음에도 되살아나는 
왕과 왕비의 살 냄새 거웃냄새 
또 몇 백 년 강물이 흐른 뒤 
타지마할의 눈부신 대리석 위에 보름달이 솟을 때 
여기쯤에서 만나기로 하자 
사랑에는 꼭 이별이 있는 법 저승의 푸른 하늘 
아래 대리석이나 오동나무 관이 아니면 
관솔구멍이 숭숭 뚫린 소나무 관 속에 
금은보화 비단옷이 아니면 
무명옷이나 삼베옷 두르고 
그도 저도 아니면 청바지 차림으로라도 
또 몇 백 년 강물이 흐른 뒤 
우리들 사랑이 타지마할에서 
이맘때쯤 다시 꼭 만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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