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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려관 스님 거룩한 자취 후손들에게 물려줘야”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
  • 정리=김익수 대기자
  • 승인 2018.11.2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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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탐라성보문화원 11월22일 세미나 개최
혜달 스님, 스님 발자취에 대해 주제발표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가 주최하고 사)탐라성보문화원이 주관한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에 대한 세미나가 지난 11월 22일 오후 3시 대한적십자사 제주도지사 대회의실에서 많은 사대부중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이날 세미나는 개회식에 이어 발제와 토론 순으로 진행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본사 관음사 주지이며 사)탐라성보문화원 이사장 허운 스님은 격려사를 통해 “이제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며 “수행자의 삶을 올곧게 사시다 간 스님의 일대기를 오늘 다시 되살리면서 우리 후손들에게도 그 분이 거룩한 자취를 물려줘야 하며, 사실에 근거해서 바로 정립되어 선양되어야 한다”고 격려했다.
이에 앞서 오홍식 (사)탐라성보문화원장은 개회사에서“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에 대한 세미나를 통해 근대 제주불교가 걸어온 길을 좀 더 명확하게 접근하고 미래의 방향을 모색하면서 발전방향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제주대학교 장성수 교수가 좌장으로 진행된 토론회는 혜달 스님(전 동국대학교 선학과 강사)이 주제발표에 이어 수암 스님(동방불교대학 학장), 오영호 봉려관선양회 상임이사가 토론자로 나와 토론에 임했다. 
먼저 주제발표에 나선 혜달 스님은 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인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에 대해 생존자의 구술이 중요한 것이므로 88명의 구술을 채록했다고 말하면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봉려관 스님의 생애기초탐구이고, 행적 및 주요 신앙관 및 제주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향후로 미룬다고 했다.

 


 

“봉려관 스님 항일의지를 갖게 된 구술도 채록…”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가 주최하고 탐라성보문화원이 주관하는 근대 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를 돌아보게 하는 세미나가 지난 11월22일 대한적십자사 제주도지사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있었던 주제발표와 토론 내용을 정리했다. <편집자주>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에 나선 혜달 스님

 

주제발표자 혜달 스님은 출생부터 입적까지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를 5단계로 나뉘어 논지를 펴나갔다.
 【비양도로 건너가 관음신앙의 확신 →산천단- 출가수계의 의지 확립→  대흥사- 항일운동의지 발아→관음사- 근대불교 발원지, 법정사- 항일운동의지 실천 】등.
1. 해월당 봉려관 스님 출생
먼저 해월당 봉려관의 출생년월에는 ‘1864년 설’과 ‘1865년 설’2가지 설이 있는 가운데, 1865년 6월 14일(음력) 제주 화북리에서 출생했다고 말하고, 속명과 관련해서는, 안봉례, 안봉려, 안려관 등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안려관이다.
18세 되는 1882년 봄,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현국남 씨와 결혼해 1남 3녀를 둔 것으로 말했다(1남 4녀 설도 있음). 봉려관 스님이 35세 되는 1899년 가을 한 고승이 스님을 찾아가 나무로 만든 조그마한 불상을 바랑 속에서 끄집어낸 후 스님에게 주면서 “이것은 관세음보살상인데 당신은 이 보살상을 방안에 잘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지 않으면 당신 아들딸이 단명할 것이라면서 가버렸다”고 한다. 진원일의 기술에 의하면 불상을 받은 봉려관은 그날부터 관음정진은 계속돼 결국 집을 나올 결심을 하게 된다고 했다.(관음사 봉려관 비문)
따라서 봉려관이 집을 나온 시기는 1901년 초일 것으로 보고, 초봄에 산천단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고 불상을 구하러 여기 저기 다니다가 1901년 늦봄에 비양도로 건너간 것으로 유추한다.
2. 산천단– 출가수계의지 확립. 하화중생의지 발아
산천단은 봉려관 스님에게도, 근대제주불교에 있어서도 제주도민에게도 매우 중요한 장소다.
비양도에서 불상을 구하지 못하고 그대로 산천단으로 돌아와서 6년간을 쉬지 않고 관세음보살을 불렀다.…1907년 음력 9월에 중 될 생각으로 전라남도 해남군 대흥사를 찾아갔다.(이야기를 남긴 사람들-안봉려관스님), (제주도 42호, pp462-463)
수계를 위해 제주도를 떠난 시기에 대해서도 두 설로 나뉘고 있다. ‘1907년 9월’이고, 다른 하나는 ‘1907년 12월 1일’이다.
산천단은 봉려관이 전체 생애에 있어서 4번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 장소다. 하나는 봉려관이 출가하여 수계를 받고자 하는 의지를 확립한 장소이고, 둘은 봉려관이 하화중생의 비장한 의지를 발아한 장소며, 셋은 무신년(1908)봄(단옷날)에 운대사에게서 가사 한 벌을 받은 장소이고, 넷은 임신년 (1932)단옷날에 담양 국성정각보살에게서 가사를 전달받은 장소다. 
이외 산천단은 봉려관 스님의 거처는 근대제주에서 최초 종교로서 불교의식이 거행된 장소다.
3. 대흥사 – 항일운동의지 발아. 근대제주불교 첫 비구니 탄생
주제발표자가 채록한 구술을 정리한 것에 의하면 대흥사에 도착해 한센병환자를 치료한 이야기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대흥사 버전인데, 대중 중 한 스님이 한센병 환자를 고칠 사람이 내일 온다는 꿈을 꾸었고, 안려관이 마침 대흥사에 와서 반신반의하고 환자를 보여주었다는 것.
둘은 제주도 버전으로 대흥사 조실이 전날 여왕이 온다는 꿈을 꾸었고, 저녁해질 무렵 안려관이 대흥사에 도착해 산내암자를 돌아보다 한센환자를 발  견하고 치료했다는 것.
봉려관 스님은 1907년 9월 출가수계를 하고자 제주를 떠났고, 1908년 1월5일에 출가수계를 마치고 제주로 돌아왔다. 이설(異說)은 5월5일은 심사숙고해야 한다.
항일의지 발아, 봉려관 스님의 항일과 관련해서는 구술만 있고 확실한 문헌 증거가 없어서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1년 여간 구술을 채록하던 중, 봉려관이 항일의지를 갖게 된 구술도 채록하게 되었다. 봉려관 스님이 항일운동을 하신 것은 대흥사 때문이다. 항일운동하는 사람들이 죽은 것을 본 것이다. 봉려관 스님은 군자금도 대흥사에 여러 번 가져다주었다. 항일투사다. 그래서 죽었다.
〔중간 요약정리 발제자가 유추하는 1908년 1월5일부터 1909년 봄까지 승려 봉려관의 주요행적 〕


  발제자는 봉려관은 귀도한 후 →산천단 본래 거처에 불상을 모시고 재(齋)를 시설하였다. →밤낮으로 관음염불정진을 하였고→토착민이 불상 모신 집을 방화해서 이를 피해 한라산 위로 올라갔고 →능화봉을 거쳐 →백록담 옛날 절터에서 7일 기도정진 →산천단에서 운대사로부터 가사를 받다→사찰창건을 결심 →사찰창건을 위해 백록담에서 100일 관음기도 정진 중 소식을 하시다→現 해월굴로 내려와서 관음사 創建地를 결성한 후, 창건을 위한 관음기도정진과 본격적인 창건 준비를 병행하시다가 →1909년 봄에 관음사를 창건한다. 
4.관음사 - 근대제주불교 발원지, 관음성지
  한라산 관음사를 창건한 스님은 ‘봉려관’이다. 관음사 창건연도는 ‘1909년 봄’이다.
5. 항일운동과 입적
해월당의 봉려스님의 입적연월일도 이견(異見)이 있다.
1938년 5월 29일 : 『회명문집』179),『근대제주불교중흥조-해월당봉려관스님』180) 등.
1937년 5월 26일 : 진원일「이야기를 남긴 사람들-안봉려스님」181),                            「안봉려관승적부」182) 등.
  해월당의 입적원인과 입적지에 관한 당시 문헌자료는 지금 전무하다. 반면, 제주관음사를 비롯해 중앙포교당소식 그리고 봉려관의 교계활동과 관련된 소식들은 당시 일간지를 비롯해 기타 자료를 통해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는 것. 해월당 봉려관 스님은 일제 강점기에 항일운동에 참여했으며, 항일방식은 항일운동자금을 조달하고, 항일운동인사의 의식주를 돌보고 이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는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이었다.
해월당이 항일운동 조력을 한 이유는 당시 제주불교가 처한 상황과 인명중시였다.
6. 법정사 - 항일운동실천
 해월당 봉려관은 1911년 법정사를 창건한다.
항일운동은 제주지역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중앙의 항일조직과 연계된 것이 분명하다. 
〔증언과 구술을 통한 발제자의 유추〕
1, 해월당 봉려관 - 방동화- 독립군 배 - 육지항일운동조직.
2, 해월당 봉려관 - 대흥사 원응- 중앙항일운동조직.
해월당 봉려관 - 박영희 - 만당- 항일운동조직.
해월당 봉려관 - 대흥사 박영희 - 항일운동조직.
3. 해월당 봉려관 - 방동화 - 제주법정사 항일인사.
   법정사 항일운동연구는 특정인물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드러내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라며, 더욱더 세심한 구술채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주제 발표의 결론】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업적은 지대한데, 역사적 기록이 미흡해, 논문에서 항일운동에서 행적을 접근하기 어렵고 고증을 통한 사실관계가 입증되고, 인물사가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번 주제발표는 해월당 연구를 위한 해월당의 생애기초탐구다. 해월당의 활약을 엿볼 수 있는 중앙포교당과 제주항일운동의 산실인 산천단, 관음사, 법정사 그리고 해월당의 항일군자금의 상세한 유입 경로는 향후 연구과제로 미뤘다.
 왜곡되거나 과장되어서도 안 되며, 있는 그대로 봐 달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러면서 앞으로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한다며 주제 발표를 마쳤다.  
〔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에서 오고 간 주제발표자와 일문일답 〕
▲ 토론에 참석한 김영보 불자는 질의에서 비구니스님이 보조역할을 했다.  수계는 평등한데, 여기서 평등을 어떻게 봐야하는가?
▼ 발제자 답변 : 남녀평등은 남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 조명철 원로불자는 조사연구를 감명 깊게 들었다. 앞으로 봉려관 스님을 위해 어떤 활동을 펴야하는가? 스님을 기리는 불교축제를 여는 것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 발제자 답변 : 축제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라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몫이라면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정리=김익수 대기자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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